좀 '아는 도시' 하나가 생겼다.
태어나서 여태껏 서울과 경기도를 오가며 살아왔다.
지방은 방학 때 할머니 댁, 여행을 통해 길어야 일주일 정도 머무는 곳이었다.
초록의 자연보다 회색의 아스팔트 바닥과 콘크리트 건물이 가득한 곳,
매캐한 매연을 들이마시며 버스든 전철이든 타기 위해
몰려가는 무리들 속에 한 명으로,
그렇게 사는 게 당연했다.
당연함과는 별개로 지루함도 고개를 들었다.
마침 OOO에서 한 달 살기, 일 년 살기 등이 유행처럼 번졌고,
그저 지나치는 여행객이 아니라 현지인으로
낯선 풍경 속에서 익숙하지 않은 길을 걷다 보면
새로운 일과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생각에 설레었다.
해외살이가 훨씬 매력적이지만 국내도 상관없었다.
당시 운 좋게 2년 동안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연구 배경이 된 지역은 지방 중소도시 K시였다.
굳이 짐을 싸서 내려올 필요까진 없었지만,
이미 머릿속은 낯선 도시에서의 삶에 대한 기대 반, 희망 반으로
가득 찬 상태라 이사와 전입까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그렇게 아무 연고가 없는 K시에서 3년 하고도 반년을 지냈다.
낯선 도시에서 3년 반을 살고 알게 된 것들이 있다.
1. 새로운 곳에 가면 먼저 알아두어야 할 곳들이 있다.
생활과 직결되는 마트와 음식점
은행과 주민센터, 건강보험공단, 시청, 세무서 등 관공서
그리고 병원.
특히 병원은 지역에 대한 아무런 정보가 없는 경우 참 난감하다.
홈페이지나 블로그에서는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가 없고
인터넷 후기보다는 아는 사람들 사이의 입소문이 훨씬 자세하고 정확하기 때문이다.
2. 지방에서 자가용은 필수다.
서울에서는 오늘 아침 끌고 온 나의 자동차가 애물단지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막히는 도로에서, 몇 바퀴를 돌아도 자리 없는 주차장에서, 길가에 세워두었다가
결국 받아 든 주차위반 딱지에 눈물을 삼킨 적이 몇 번이던가.
사실 자동차로 이동하는 것보다 전철이 더 빠른 경우가 많아
나의 자동차는 도로를 달리는 날 보다 주차장에 세워두는 날이 더 많았다.
그런데 내가 내려온 이곳은 일단 전철이 없다.
차로 20분 거리를 버스로는 1시간 넘게 가야 한다(배차시간 정보는 어플로 확인이 거의 불가능하다).
애물단지였던 자가용이 여기서는 필수품이다.
여기서 놀랐던 것 중 하나는 주민들은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주차장이 걸어서 5분 거리 안에 있어도 대부분 본인이 방문하는 곳 바로 앞에 주차한다.
좀 걷더라도 주차장 라인 안에 차를 세워야 마음이 편한 내가 오히려 강박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3. 모든 길은 ‘아는 사람’으로 통한다.
학연, 지연 인프라가 활성화되어 있다.
이곳에 학연과 지연이 없는 나는 이곳에 세금을 내고 살아도 여전히 외지인이었다.
몇 가지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깨달았다.
기반은 새롭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새로 온 누군가가 하는 말이 그들에게는 이곳 사정을 하나도 모르면서 하는 뚱딴지같은 말이다.
환상의 섬 제주도에 살러 간 이들이 몇 년 안에 포기하고 떠난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옳고 그름의 문제도, 좋고 나쁨의 문제도 아니다.
그곳에서 태어나 자라고 살면서 익힌 문화,
그리고 그 사이에서 연결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형성된 그들만의 신뢰감은 서류 몇 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서울에서 더 긴 기간을 살았어도 친인척과 친구들이 있는
고향을 더 편하게 느끼시는 부모님도 이제는 이해가 된다.
4. 요즘, 새로운, 핫하고 힙한 것들은 모두 서울에 있다.
지방에 살면 문화생활이 그립다는 이야기를 듣고, 갸우뚱했었다.
살아보니, 새로운 이벤트가 없어서 심심하다는 이야기였다.
요즘은 눈만 뜨면 새로운 브랜드, 제품, 팝업, 전시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모두 서울에 있다.
서울 안에서는 직접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기사나 영상으로 접한다.
직접 경험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
서울에 갈 때마다 그동안 쌓아온 목록들을 찾곤 하지만,
이미 기간이 지났거나 한물간 것이 되어버린 후인 경우가 많다.
5. 도심에서는 절대 할 수 없는 것, 볼 수 없는 것들을 경험할 수 있다.
관광지를 관광지가 아닌 것처럼 즐길 수 있다는 것과
차로 30분만 달리면 초록색과 파란색이 가득한
천혜의 자연을 느낄 수 있다.
주말만 피한다면 그림 같은 풍경을 고요하게 내 것처럼 즐길 수 있다.
이제 다시 익숙한 그곳, 복작거리는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간다.
낯선 도시에서의 살이 경험은
혼자여서 두려웠고,
이방인이어서 외로웠지만,
바쁘고 지루한 일상에 지칠 때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좀 ‘아는 도시’ 하나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