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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을 사는Joy Apr 05. 2023

제제를 바라보며

손을 뻗으면 닿을듯 닿지않는 너에게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J.M.바스콘셀로스     


어른. 기다림. 경청과 인정     

교육에서 ‘원 케어링 어덜트(one caring adult)’란 말이 있다. ‘단 한 명의 어른’으로 믿음의 눈으로 아이들을 봐줄 사람, 관심을 가지고 다가와 줄 사람, 그래서 아이들이 간절히 찾고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단 한사람의 영향력만 있다면 아이는 올바른 마음을 가지고 자라날 수 있다는 의미와 통할 것같다.

그 사람이 부모가 되면 좋겠지만 아닌 경우가 많다.

옛날에는 아이 하나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함께 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의 삶도 브라질의 힘든 노동자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부모는 맞벌이로 힘겨운 삶을 살았고 아이들은 부대끼며 온 마을이 함께 키웠다. 1988드라마나 그 옛날 한지붕 세가족드라마를 아시는가? 아이들은 많은 어른들을 보고 배우고 함께 자랐다. 이시대가 아이를 잘 키우려는 목적은 더욱 크고 확고하나 개인주의가 심해지며 아이들은 가족 이라는 울타리에서 뭐가 옳고 그른지 사회적 판단의 기준이 모호한 채 자라나고 있다.  부모 또한 내 양육방식이 맞는지 틀리는 지 확신하지 못한채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편중되어 아이를 키운 결과 많은 갈등을 빚으며 살아간다.   

        

내가 더 잘 알거라는 착각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되 정답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늘 상기해야 한다. “아이가 뭘 알겠어 가르쳐줘야 알지” 란 말에는 상당한 어패가 있다.

우리는 얼마나 잘 아는가?

얼마전 지인의 아들이 중학교에 입학하고 큰 고민에 빠져있길래 얘기를 나누었다. 즐겁게 놀다가 흥분해있는 상태에서 다른 아이들이 밀쳐 넘어지는 바람에 급격한 감정의 변화가 생겼는데 넘어진 자신을 보고 웃던 친구들이 자기를 비웃는다고 생각했고 주먹을 날렸으며 그 결과 아이들이 서로 주먹질을 했다는 것이었다. 내 기준에서는 당연히 친구를 때리면 안된다고 가르쳐야겠지만, 내 마음속 깊은데서 올라오는 감정선도 발견할 수 있었다. 선방은 잘했다 라는 마음이 드는 순간, "자기 아들 더 이상 절대 쉽게보지 못할거야" 라는 위로아닌 위로를 남긴채 지인의 편에 서서 나도 잘 모르겠는 밑도끝도 없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지난 주말 저녁, 이런 상황이 너에게 혹은 주변에서 발생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까 라는 화두를 던진 나는 아들과 아빠의 얘기를 듣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상황에서는 먼저 때린 건 실수한 거라고. 맞기 전에 때려야 하는 순간도 분명히 있지만 그 상황은 그러지 말았어야 한다는. "왜냐하면 .." 그 이유는 내 생각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자세히 적기는 어렵지만 분명히 문제 해결 과정은 부모가 그러면 안돼 의 도덕적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은 그 성장 과정 속에 자라는 아이들만의 이유가 분명 존재했으니 나는 이제 더욱 조언이나 가르침. 또 더 속속들이 알려고 하는 나의 기준에 있어 좀 더 흐리멍텅해질 필요도 있는가 에 대한 생각과 함께 아이의 사생활에 좀 더 호기심 가득한 질문을 던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배턴을 넘겨준다는 것

이어달리기는 다음 주자가 배턴을 넘겨받아야만 이어나갈 수 있는 경기다.

내가 더 잘 달린다고 대신 계속 뛸 수도 없고 물론 함께 뛸 수도 없다.

어디까지 가르쳐야 하고 어디서부터 배턴을 넘겨야 하는지 기준이 매우 모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시미 이치로의 『미움받을 용기』를 읽어보면 자의적 의지에 따른 결과의 책임소재 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아이의 과제. 여기까지는 부모의 과제. 딱 잘라 정의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되는가? 그리고 그렇게 실행 할 수 있는 용기가 과연 나에게 있는가? 연습이 되지 않은 아이에게는 어떤 방법으로 과제의 분리를 적용할 수 있을까 고민해볼 일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한다는 것    

그 옛날 공자 왈 “어진 사람은 걱정하지 않고, 지혜로운 사람은 미혹되지 않으며, 용기있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느리게 그렇지만 꾸준하도록.

그 방향성을 뚜렷이 함께 정의하고 불안감이 올라올 때를 대비하여 항상 상기하며.

배움은 깊게. 그러려면 천천히 호기심과 일탈을 인정하면서.

제안을 하되 방법이라는 배턴을 아이에게 넘길 수 있는 용기를 장착하고 어떠한 결과에도 아이의 해결방안을 존중하고 의논하고 헤쳐나가는 것이 결국 아이에게 큰 힘이 될 거라는 믿음, 또한 그 아이의 가능성을 믿음을 통해 인간의(부모의) 가장 큰 적인 불안을 잠재우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내가 판단하고 실행하기 전에 아이의 의견이나 내 의견에 대한 생각을 ‘열린’ 마음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가끔 나는 생각한다. 내가 어렸을 때 부모님이 내 인생에 있어 청소년기 로드맵을 째 주셨다면 내가 달려졌을까? 글쎄. 딱 떠오르는 생각은 아니오 다. 직업에 대한 변화는 있었을지 모르나 나의 정체성은 지금과 큰 변화 없이 이대로 컸을 거라 생각한다. 왜일까? 그렇다면 부모의 기대나 노력은 다 어디로 사라지는 걸까? 결과에 따른 부모의 만족 혹은 불만족의 선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럼 아이에게는 무엇이 남는 걸까? 기억? 추억?      

행복은 크기가 아니라 횟수의 합 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불행도 크기 보다 횟수 일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이다.

불행의 횟수를 상쇄할만큼 행복횟수가 있었다면 이렇게나 슬픈 책은 아니었을 텐데 라는 생각도 든다.

나는 학창시절 괴로움의 기억이 거의 없다. 물론 엄한 아버지 품에서 살았고 매도 맞으며 자랐지만 그저 하나의 에피소드 정도다. 왜일까? 횟수의 빈번함이 없었기 때문일까?        

우리가 제제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끊임없이 겪어내는 감정적 신체적 고통 뿐만 아니라 내 아이가 아니라서 보이는 것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보는 시각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떠오른 것은 기다림 이었다.

조금만 더 들어주지..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는지 물어봐주지..

그때 마음은 어땠는지 물어봐주지.. 그리고 지금 나는 그렇게 하려 노력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제제에게 사랑을 보내며     

저자인 J.M 바스콘셀로스의 어렸을 적 실제 겪은 이야기라서 더욱 슬펐던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 작품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회적 상황 혹은 가정의 이야기라고 치부하기엔 안타깝고 슬프기 그지없다. 그렇다면 현실로 돌아와 우리가 그런 환경이라고 생각했을 때 똑같이 할 수 밖에 없는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것은 뭐가 있을까?

저렇게 작지만 똑똑한 아이가 어떤 생각으로 환경을 보고 어려움 속에서도 루이스와 고도이아를 사랑했는지 그 아픔을 겪어내며 슬퍼하고 처절하게 지내고 있는지 나는 독자의 눈으로 본다. 그 당시 주위에서 보지못한 아이의 모습을 그리고 지금 이시대를 살아가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고민해보면서.

 또한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들이, 힘든 삶을 사는 그들에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 아픔을 듣고 품어줄 한사람 포르뚜까와의 기억이 있었다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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