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일하는 곳에는 고양이가 한 마리 있다.
이 고양이는 처음부터 이곳에 살았던 건 아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이곳의 일원이 되었고, 지금은 우리와 함께 생활하는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는 나로서는 쉽게 다가갈 수는 없지만, 그 아이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진다. 이 고양이의 이름은 ‘다행’이다.
이름이 왜 ‘다행’일까?
나는 처음에 그 이름이 다소 특이하다고 생각했지만, 이야기를 들은 뒤에는 그 이름이 주는 의미를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고양이는 내가 데려온 것이 아니다. 같이 일하는 형이 데려왔다.
어느 날 밤, 형이 길을 운전하던 중 도로 위에 작은 고양이 한 마리가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차를 멈추고 고양이에게 다가갔을 때, 형은 경악했다. 고양이는 온몸에 피가 묻어 있었고, 귀 한쪽이 없었다. 가까이서 살펴보니 얼굴과 등에도 칼로 그은 듯한 상처가 있었다. 누군가가 이 작은 생명을 상대로 끔찍한 짓을 한 것이 분명했다. 형은 망설임 없이 고양이를 데리고 동물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서는 고양이가 생존할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귀와 얼굴의 신경이 손상되어 있었고, 온몸에 상처가 가득했다. 하지만 형은 포기하지 않았다. 며칠 밤낮을 병원에서 지내며 고양이의 상태를 살폈고, 결국 긴 치료 끝에 고양이는 생명을 되찾았다. 그렇게 회복한 고양이는 우리가 일하는 공간으로 오게 되었고, 지금은 이곳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고양이는 처음에는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사람의 손길이 두려운 듯, 멀리서 우리를 경계하며 한참 동안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오른쪽 얼굴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고, 하품이나 울음을 터뜨릴 때도 얼굴 한쪽만 겨우 움직였다. 그러나 우리는 꾸준히 밥을 주고 다친 곳을 치료하며 고양이에게 다가갔다. 시간이 흐르며, 고양이는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지금의 다행이는 정말로 다행스럽게도 완전히 달라졌다.
우리에게 애교를 부리며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모습은 마치 “개냥이”를 떠올리게 한다. 사람의 손길을 두려워하던 그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이제는 우리에게 먼저 다가와 머리를 비비고 쓰다듬어 달라고 조른다. 고양이가 이렇게 잘 견뎌주고, 건강하게 지내주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래서 형은 이 아이에게 ‘다행’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작은 생명의 이야기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누군가는 작은 생명을 보며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악행을 저지른다. 그러나 또 누군가는 그 생명을 살리겠다는 마음 하나로 차에서 내려 고양이를 품에 안는다. 우리 사회에는 이 두 가지 선택이 공존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형이 그날 밤 선택한 행동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었는지 새삼 깨닫는다.
‘다행’이라는 이름은 단지 고양이의 생존에 대한 감사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이 작은 존재를 살리기 위해 행동에 옮긴 형의 용기와, 그런 선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희망을 상징한다. 고양이가 여기서 이렇게 행복하게 지내는 지금의 순간이 얼마나 다행인지, 나는 가끔 다행이를 보며 되새긴다.
작은 생명은 우리의 행동을 통해 살아날 수도, 사라질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다. 누군가의 따뜻한 마음이 또 다른 다행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 세상은 조금 더 따뜻해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