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의 숲을 읽고.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

by 내 곁

노르웨이의 숲은 학창 시절에 한 번 읽어보았던 책이었다. 상실의 시대라는 동일한 제목으로 출간된 적이 있었다는 것을 굉장히 인상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당시의 나에게도 적지 않은 파문을 주었음이 분명한 책인데 내용은 어슴프레 기억이 나지 않아 새로운 마음으로 책을 들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은, 조금은 어렵고 난해하고 딱딱하다는 개인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몽글몽글한 에세이나 수필집, 그런류의 소설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닥 애정을 가지게 되는 작가는 아니다. 아니, 아니었다. 노르웨이의 숲을 다시 읽어보고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를 존경하게 되었다.

와타나베라는 한 사람을 중심으로 기성세대가 이끌어 내는 화려한 고도성장과 새로운 세대가 불러 일으키는 저항문화가 공존했던 60년대 말 일본의 시대적 상황을, 십대에서 이십 대로 넘어가는 청춘기의 방황을, 전혀 다른 매력을 가진 두 여성에게서 느끼는 전혀 다른 사랑의 감정과 책임감을, 어떻게 이렇게 차분하게, 체계적이면 감성적으로 써내려 갔는지 내가 내 눈으로 읽고서도 믿을 수가 없다. 최대한 음미하는 느낌으로 천천히 책을 읽었는데 나도 모르게 속도가 빨라지는 것을 느끼고 다시 제동을 걸기에 바빴다. 그만큼 가독성이 좋고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책이여서 책을 읽는 며칠 동안 난 노르웨이의 숲에 푹 빠져 살았다.

나의 청소년기에서 성인기로 넘어가는, 소위 성인식을 치뤘던 그 시기를 생각해보면 「자유」 라는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공부만 하던, 제약을 많이 받던 시기를 지나 그 어떤 제약도 무의미하게 느껴졌던, 고삐 뿔린 스무살. 그 때 난 내가 청춘인 것을 인지했고, 그 청춘을 맘껏 즐겼던 것 같다. 친구들과의 우정도, 이성과의 사랑도, 내가 원하는 것을 골라 할 수 있었던 공부도 뭐든 것이 활기찼던 그 때. 청춘이 한참이나 지난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릿하고 다시 돌아갈 수 없음에 서글픈 감정이 드는 행복하기만 했던 그 때. 내 인생에서 가장 찬란했다고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말할 수 있는 내 청춘. 스무살.

그런데 노르웨이의 숲을 읽고 나니, 과연 나는 나의 스무살을, 나의 청춘을 잘 사용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남는다. 그런 행복감 속에서, 그런 자유 속에서 와타나베처럼 좀 더 깊게, 조금 더 심오하게 사랑이란 것을, 책임이란 것을, 인생이란 것을 생각했다면 지금의 나는 달라져 있을까.

와타나베는 하나뿐이었던 학창시절의 친구 기즈키를 잃고, 그의 여자친구였던 나오코와, 나오코와는 전혀 반대인 미도리의 사이에서 사랑을 하고 책임을 느끼고 고뇌를 겪는다. 어느 것이 진짜 사랑인지, 전혀 다른 형태의 사랑 속에서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와타나베를 보면서, 내가 너무 가볍게 청춘을 날려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사람에게는 그 시기에만 할 수 있는, 느낄 수 있는 것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같은 봄이어도 시기에 따라 느껴지는 햇살, 그림자, 새소리, 날리는 꽃의 모양과 냄새가 너무나 달라지는 것처럼.

와타나베가 나오코와 미도리 사이에서, 그리고 그의 친구 레이코와 나가사와 사이에서 소통하고 책임지고 행동하는 것을 보며 너무 가벼웠던 나의 청춘에 일말의 후회를 느끼게 된 것이다. 인생의 황금기 같은 그 시기를 나는 제대로 보냈는지에 후회.

하지만 알고 있다. 내가 다시 그 때, 스무 살의 나로 다시 돌아간다 해도 나는 그렇게 살았을 것임을. 어느 정도는 망각된 나의 스무살도, 비극이었지만 희극으로 미화되었을지도 모를 나의 스무살일지라도 나에게는 행복이었고 그것이 나의 청춘이었고 나는 그것으로 되었으므로.

나는 이 책 노르웨이의 숲도, 지나가서 아쉬운 나의 청춘도 사랑한다.

와타나베가 말한, “봄날의 곰만큼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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