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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ecialA Aug 17. 2023

03 수포자가 회계감사라니

재무회계의 늪


수포자에게 맡겨진 재무회계라니


입사 후 가장 시급한 일 중 하나는 회사의 재무상태를 파악하는 일이었다. 입사 당시 대표님은 곧 회계담당 직원을 뽑을 예정이니 당분간만 재무회계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하셨다. 초기 스타트업이니 인력 충원하는 것이 한 명 한 명 고민스러울 거라는 깊은 공감(?)으로 부탁을 수락했다.


회사에는 법인 통장 몇 개에 용도를 알 수 없는 자금들이 흩어져 있었고, 법인카드도 없는 상태였다. 거기에 정부지원 과제용으로 개설된 연구비 카드와 통장도 있었다. 애당초 수포자였기도 하고, 재무회계 관련이라면 기피해 왔던 일이라 참 난감했다. 관련 지식도 없는 상황이라 의존할 곳이라고는 기장대리를 하고 있던 세무법인뿐이었다. 그런 상황에 당장 2월에 회계감사와 주주총회를 해야 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까지 들렸다.


우선 기장대리를 하던 세무법인에 관련 자료를 모두 요청했다. 그리고 회사 재무상태부터 정리하기 시작했다. 통장 잔액을 모두 확인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회사의 법인 통장 녀석들에게 역할을 부여해 주었다. (너는 오늘부터 경상비 계좌다, 너는 자본금 계좌다, 너는 ….) 각 통장별로 어떤 항목들이 지출되고 있었는지 쭉 정정리를 해 나갔다.


자본금 입금 내역과 주주명부를 비교하며 내가 오기 전 1년간 벌어진 일들을 차분히 훑어보았다. 벌어진 일이라 하면 유상증자가 있었다거나 투자를 받았다거나 이사회나 주주총회에 결의사항이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어떤 계약을 맺었고, 진행상황은 어떠한지, 인건비 지급이며, 법인세, 부가세 등 각종 세금은 어디까지 처리가 됐었는지, 미수금이나 미지급금은 없는지 등등이었다.


내가 오기 전에 이미 시드 투자를 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투자금이 들어있는 통장도 꼼꼼히 확인했다. 투자금은 용도에 맞게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지출내역을 꼼꼼히 관리해야 하는 점이 있었다. 그리고는 그간의 거래내역을 쭉 살피며 세무사님과 이전 회사에서 재무회계를 담당하던 후배에게 연락해 바보 같은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세무사무실도 변경하다니


그 와중에 회계감사가 끝나자마자 세무사무실을 변경했다. 기존 CFO가 퇴사하게 되면서, 그분의 소개로 계약했던 세무사무실을 변경하겠다는 대표님의 오더로 새로운 세무사무실과의 계약을 하게 되었다. 새 세무사로 자료를 이관하고 그간의 장부를 모두 우편으로 송달받았다. 내가 초짜임을 감안하여 월결산, 분기결산을 추가로 요청했다. 인사 관련된 부분도 어느 정도 부탁해서 업무 부담을 줄였다.


스타트업이라 양이 많지는 않지만 나 홀로 감당하기에는 생각보다 살림살이 규모가 넓고 방대했다. 창업 초반엔 인건비 부담이 크기 때문에 한 명을 채용해서 얻는 리스크보다는 그나마 그 분야에 전문가인 업체에 맡기는 편이 훨씬 믿음직스럽다. 혹여나 초기 창업 회사라면 가능한 한 거래처에 어느 정도 많은 부분 맡겨서 부담을 줄이는 걸 추천한다.




경리** 최고!


재무회계업무를 진행하면서 사실 제일 많이 도움받았던 건 네**의 경리** 카페였다. 예전에 어디선가 카페 광고였는지, 홍보글이었는지 보고 나서 알게 된 곳이었는데 내가 이 카페에 직접 가입을 하고 활동을 하게 될 거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 했었다. 바보 같은 질문을 할 곳도 없거니와, 철면피가 되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질문을 한다는 것도 어느 정도 한계가 있는 일이었다.


인터넷을 뒤져 정보를 찾아낸다 한들 현업에서 10-20년을 해오신 경*** 선생님들(?)의 노하우에는 비할 바가 못되었다. ‘나 좀 살려주시오’ 하고 묻는 바보 같은 질문에 칼같이 답글을 달아주고, 실무의 실무의 실무단이어야만 알만한 정보를 친절하게 대답해 주는 익명의 선생님들께 몇 번이고 감사인사를 마음으로 전해야만 했다.


가끔씩 나보다도 더 모르는 분들의 질문을 보며 ‘그래, 내가 진짜 심각한 거는 아니구나’, ‘그래 나는 저 정도는 안다(?)’라며 아주 작은 위안을 얻기도 했다. 시간이 가면서 점점 나도 실무짬이 쌓이면서는 카페를 드나드는 빈도가 줄어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면 난 해당 카페를 적극적으로 추천할 생각이다.




해보자, 회계감사


우리 회사는 아주아주 작은 신생 스타트업이었으므로, 외감대상이 아니어서 사실 회계감사에 대한 부담은 전혀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대기업 펀드에서 투자를 받은 터라 입사하자마자 3월 주총 전에 회계감사를 끝내고 보고서를 제출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전 직장에서 회계감사 시즌이  될 때마다 요청 자료를 만들어서 회계팀에 제출만 했었지 직접 한다는 건 정말 쉬운 일은 아니었다.


물론 자료들을 회계사무소에 전달만 하면 된다고 착각하는 사람도 있을 텐데, 자료를 넘기기에 앞서 일단 그전에 장부 마감부터 해야 하기 때문에 계정별 원장 보는 법부터 알아야 했다. 또 연구개발 업종이기에 그에 맞는 계정이 개설되어 있는지, 계정별로 잘 기장이 되어있는지, 목적에 맞게 잘 지출이 되었는지, 오차는 없는지, 내가 없는 1년 치, 그리고 내가 있는 1년 치를 다시금 꼼꼼히 봐야 했다.


회계법인, 세무법인 양쪽 담당자에게 내가 회계감사 초보라는 사실을 미리부터 이실직고하고 잘 부탁한다고 섬세하게 설명을 해주십사 부탁했다. 회계감사는 초보지만 직장인 짬밥은 좀 먹어서 호락호락한 성격은 아니라는 걸 그들도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모르는 건 친절하게 설명도 해주었고 이렇게 처리하는 편이 좋으실 거다라는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덕분에 기한에 맞춰 첫 회계감사를 잘 마무리하고 첫 결산보고서를 받아 들었을 때 정말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우리 회사는 외감법 대상은 아니지만 투자사의 요청으로 1년에 2번 회계감사를 받았다. 한 번은 회계연도 마감하고 하는 정기 회계감사이고, 한 번은 시드 투자 금액만을 대상으로 투자사에서 별도로 진행하는 감사였다. 재무회계 업무를 당분간만 해달라고 부탁하셨던 대표님 말씀이 이렇게나 길어질 줄은 몰랐지만 퇴사하는 그날까지 회계감사는 3번 정도 경험했다. 할 때마다 긴장되고 일정에 쫓기느라 힘들었지만 이제 나는 어느 회사, 어느 자리에 가더라도 뭐든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은 생겼다.





회사 규모가 작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부분들도 많아서 ‘재무회계의 맛’이라고 할만한 디테일하고 어려운 업무들을 경험해보지는 못했다. 그래서 누군가는 구멍가게 살림살이를 했다고 비웃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 일을 하면서 회사의 전체 경영에 대한 큰 그림을 보는 시각이 생겨났다. 재무 상황을 고려한 마일스톤을 수립하고, 추후에 시리즈 투자를 진행할 때 밸류에이션을 위한 추정손익계산서 등을 만들 수도 있게 됐다.


적어도 나는 완전한 바닥부터 시작해서 책임감으로 최선을 다해 끝까지 마무리를 해냈다. 이런 경험이 있다는 건 젊은 시절 나의 직장생활에서 꽤나 중요한 일이었고, 앞으로 내 앞길에도 큰 도움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렇게 나는 또 한 번 성장을 했다.



요약 한 줄.


-      경리** 만세!

-      힘들었지만 시야를 넓히는 데에는 재무회계만 한 것이 없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재무회계를 하라고 한다면…. 선택할 수 있다면 안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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