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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ecialA Aug 31. 2023

05 IR자료, 한번 만들어볼까


앞서 회사 마일스톤을 정리하고 나서는 본격적으로 IR자료 만들기에 돌입했다. 연구팀에서 시간에 쫓기는 실험과 싸우는 동안 경영기획실에서는 투자 유치 전쟁에 나갈 무기를 만들어야 했다. 드디어 기획자로서의 역량을 발휘할 때가 온 것인가. 거의 2달여 기획다운 기획 근처도 못 가보고 온갖 일을 도맡아 처리하고 있던 터라 몸이 근질근질했던 참이었다.


우리 회사는 시드투자를 제법 규모 있는 곳에서 받은지라 연구데이터만 잘 나와준다면 후속투자유치가 그다지 어려운 편은 아니었다.


먼저 해야 할 일은 PoC(Proof of Concept)를 정리하는 것이었다. 개념 증명이라고도 불리는데 보통 우리 같은 신약개발회사들의 타깃 마커의 유효성을 검증하는 걸 말한다. 수 번의 실험데이터로 왜 우리가 이 타깃을 아이템으로 선정했는지 그 근거를 제시하는 과정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PoC가 명확하게 정리가 되면 이것을 바탕으로 우리가 제시하는 마일스톤이 reasonable 하다는 것에 대한 나름의 논리를 풀어나간다. 거기에 회사 정보(팀 구성, 재무현황, 주주현황 등)를 포함하여 ppt 화면에 다채롭게 채워 넣는다. (마일스톤 관련 내용은 이전 편 참고). 그게 IR자료를 만들어 낸 과정이었다.





아마도 사전적 정의는 좀 다를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이해한 IR자료는


우리가 가진 아이템은 무엇이고
어떤 과정을 통해 무엇을 만들 것인지,
그리고 그 결과로
투자자들에게 언제 어떻게 수익을 가져갈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것.


그 모든 과정을 fancy 하게 다듬어 투자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가능한 쉽게 ppt에 담아내는 것.

그것이 IR자료였다.


연구자와 경영기획자의 시각차는 여기서 생겨난다.

전문 분야이니만큼 어느 정도까지 설명의 수준을 낮출 것이냐가 관건이다.



연구자들은 이 정도는 당연히 알겠지 싶은 내용이 있는 반면,
문외한인 사람들 입장에서는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한 부분도 있다.



연구팀은 내용 설명이라던지 디자인이나 장표 표현 방식에 있어서 '이 정도면 다 알아들어요, 이 정도면 훌륭하다'라고 생각해서 '정말 이렇게 한다고?' 싶게 당혹스럽게 하는 때가 있었다. 경영 쪽에서는 실험 데이터에 대한 분석이나 이해, 단어나 이미지 표현 면에서 '이게 맞나요? 제가 제대로 이해한 게 맞나요?'류의 질문을 해대기 일쑤였고, 역시나 형식줄맞춤에 집착을 보였다. 극문과와 극이과 사이에서 중간 다리의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렇게나 시각차가 존재한다는게 놀라웠다.


IR자료는 그 PT자료만 보고도 이 회사에 대한 현재와 미래가 그려져야 한다. 그렇기에 전체적인 내레이션을 어떻게 가져갈 것인지가 구성에서 가장 고민했던 부분이었다. 여기에 어떤 내용을 부각할 것인지, 이 데이터를 넣을지 말지 하는 고민까지 덧붙여지면 장표 한 장 한 장 그냥 넘어가는 곳이 없었다. 타 사 IR자료도 꽤나 많이 보면서 참고를 했다. 비슷한 단계에 있는 회사들부터 단계를 더 앞서나간 곳까지 두루 보면서 담을 내용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 덕분에 첫 초안을 만드는데도 꽤나 시간이 오래 걸렸다.   






물론 IR자료도 미팅 상대에 따라서 버전을 달리 만들기는 하지만, 결국은 전문의 영역이라 이해를 돕기 위해 그림을 적극 이용할 수밖에 없다. 작용메커니즘을 그림으로 표현할 일이 많아 해당 부분은 디자인업체에 외주를 맡겼다. 외부이미지를 가져다 출처표기를 하고 쓰는 경우도 있지만, 앞으로 사용할 때가 많은 부분은 저작권 문제 등을 고려하여 이미지를 제작했다. 만들어진 이미지가 우리 IR자료 디자인과 톤 앤 매너가 통일되었으면 해서도 있다.


기본 버전이 하나 마련되면 public 버전은 웹사이트 등에 올려놓거나 언제든지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도록 사무실에 비치를 해놓는다. 업데이트 사항들은 최대한 반영해서 최신버전을 항상 유지하고, 투자자 미팅이 잡히면 투자자의 특징에 따라 어필할 수 있는 부분을 수정해 준비했다.






첫 IR자료가 만들어지고 나자, 첫 번째로 든 생각은 내가 또 하나 새로운 경험을 해냈다는 것이었다. 처음 시작할 땐 제안서 쓰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것과는 조금은 다른 맛이 있었다. 이전에 제안서 쓸 때는 내가 하는 일이 메인이어서 내가 기획하는 대로 다른 것을 맞춰나가면 됐다고 한다면, 이번엔 연구진의 타임라인에 맞춰서 다른 부분을 기획을 해나가야 한다는 점이 좀 달랐던 것 같다. 회의에 회의를 거듭하고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내고 이런저런 의견 조율 속에 정신이 없었지만 그런 순간들 모두 회사 입사한 이래로 제일 재미있었다. 역시 난 기획자의 습성은 버릴 수가 없나 보다.


그다음으로 든 생각은 세상에 우리 회사만큼 멋진 회사가 없다는 거였다...! 프로필 사진에서 멋지게 팔짱을 끼고 선 임원진을 보며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완벽한 사업이라니, 투자를 안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온갖 좋은 건 다 들어있었다. 내 역할은 들고나가실 무기를 만드는 것이었으니 일단 거기까진 잘 해낸 것 같아 뿌듯했다.


자, 이제 무기는 준비됐고, 투자 유치 전쟁에 나서 볼까.


 

요약 한 줄.

- IR자료만 보면 세상 최고 너무 멋진 회사다

- 연구와 경영, 그 시각 차이를 극복하는 게 첫 번째 과업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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