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에도 딸 드림렌즈를 끼워주며 자기 전까지 우리는 치열하게 싸웠다.
절친도 아니고 연인도 아닌 우린 12년 차 모녀사이. 크라는 키는 안 크고 무슨 일인지 반갑지도 않은 사춘기가 작년 겨울 떡하니 들이닥쳤다. 또래친구들은 아직이라는데 왜 이 녀석은 하지 말라는 것만 이리도 빨리 시작하는지. 딸의 잘못도 아닌 것을 딸의 잘못인양 계속 혼자 두런두런하며 불안한 마음을 잠시나마 진정시켰던 것 같다. 지독한 그것은 우리 집의 공기를 딸의 온기를 그리고 나의 모성애를 유난히 추웠던 그 해 겨울날들의 온도처럼 차갑게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그것은 푹푹 찌는 올해 여름날까지도 ‘아직’ 함께하고 있다.
추웠던 날에도 사춘기 딸과 싸우고 나면 그렇게도 속에서 천불이 올라와 더웠는데 그 전쟁을 이 더운 여름날에도 계속하고 있어서일까, 사우나에서도 땀 한 방울 안 나던 아가씨는 어느새 땀보가 다 되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이것도 딸의 잘못이 아니라 내가 갱년기를 맞이해서 그런가 보다 싶다.
왜 부모님들이 어른들이 하던 말씀은 대부분의 순간 척척 들어맞는 걸까.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사소한 말 한마디로 내 속을 다 헤집어 놓는 딸아이를 보며 저 말을 얼마나 생각하고 또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얼마나 또 혼자 울었는지 모른다. 나의 30대는 오직 너였는데 그리고 이제 갓 마흔을 맞이했는데 그런 내게 돌아오는 게 고작 이런 건가 싶어 정말이지 너무 슬픈 날이 많았다.
그러다 문득 정말 오래간만에 자고 있는 딸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또 선풍기를 얼굴에 갖다 대고 자고 있네”, 툴툴거리며 방에 들어간 날이었다. 입을 헤 벌리고 콜콜(쌔근쌔근 이란 표현은 도저히 못쓰겠다. 그러기엔 너무 커버렸다) 자고 있는데 갑자기 어릴 때 내 품에서 젖 먹다 자던 아이 얼굴과 오버랩되는 게 아닌가.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도 또 눈물이 핑 돈다. 갱년기다 확실한가 보다. 다시 그 상황으로 돌아가서.. 내 안에 잠들어버린 딸아이에 대한 모성애가 갑자기 샘솟기 시작했다. 엄마들의 레퍼토리는 늘 비슷하듯, 그 조그만 아이가 언제 이리 컸나 싶으면서 건강하게 잘 자라주어 대견하다는 깜짝 놀라게 만드는 생각까지 드는 게 아닌가. 역시 엄마란 존재는 위대하다.
그 감성 충만한 밤 이후로 딸과 아주 다정하게 지낼 것 같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지금도 싸우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얼마 전 친정엄마가 내게 물어보셨다. “요즘 소율이는 어때? 좀 괜찮아졌어?”
손녀의 사춘기 진행상황을 잘 알던 엄마가 당신 딸이 걱정되어서다.
나도 모르게 의외의 답변이 튀어나왔다. “응 좀 나아지고 있어, 걱정 마 점점 좋아지나 봐.”
오늘 아침 등굣길에도 말로 비수를 꽂고 가던 딸이 나아지고 있다니 난 대체 무슨 소리를 한 건가 싶어 엄마랑 전화를 끊고 가만 생각해 보았다.
좋아진 건 네가 아니라 나였어.
너의 태도가 좋아진 게 아니라
너를 생각하는 나의 태도가 나의 마음이 좋아진 거였어.
딸 방의 문고리가 떨어진 지 일주일이 넘어간다. 아니 더 정확히 상황설명을 하자면 엄마에게 대들던 딸이 자기 성질을 못 이기고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가다 문고리가 고장 나버렸다. 엄마에게 함부로 하는 건 용납 못하는 아빠는 딸에게 한참을 훈계하고 일정시간 화난 척(?)을 했다.
그리고 그날 밤 혹시라도 고장 난 문고리 때문에 딸이 방 안에 갇힐까 큰 덩치에 땀을 뻘뻘 흘려가며
그것을 조심스레 떼어냈다. 그 덕분에 아무리 화가 나도 요즘 딸은 방문을 걸어 잠그지는 못한다.
또 그 덕분에 나는 땀이 날일이 조금 줄었다.
딸, 이건 비밀인데 말이야 새 문고리 주문하는 거 엄마가 깜빡해서가 아니야.
문고리를 고치면 너와 나의 연결고리가 없어질 것만 같아. 문고리는 한~참 후에 사주는 걸로 할게.
그리고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