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꽃 Sep 27. 2023

먹구름

어제부터 내내 하늘이 잿빛이다.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아이의 얼굴처럼 잔뜩 어둑해진 하늘이 꼭 내 맘 같다. 

유난히 기나긴 명절 연휴를 앞두고 해 놓아야 할 집안일로 마음이 분주한데도 불구하고 점심약속에 흔쾌히 응했다. 평소 성격이라면 약속은 다음으로 미뤘을 텐데 잠시나마 복잡한 마음을 좀 풀어내놓고 싶었다. 달달한 커피 향에 빠져들 무렵 괜히 안 하던 짓을 했구나 싶었다. 

자리를 함께한 언니들은 이번 명절에 시댁에 안 간다는 것이 아닌가. 물론 가까운 사람의 좋은 일은 함께 축하(?)해주곤 했지만 이번에는 참으로 부럽기만 했다. 




올해로 8살이 된 아들은 내 잔머리가 내려오면 귀 뒤로 넘겨주는 그런 다정한 녀석이다. 12살 딸은 이미 나의 명절 스트레스를 알고 있었지만 아들은 엄마가 명절을 힘들어하는걸 이번에 처음으로 체감한 듯하다. 동식물을 아주 사랑하는 녀석은 이번 추석에 시골 할머니 집에 가면 새끼고양이를 데려와 키우겠다고 선언했었다. 달력을 보며 명절을 손꼽아 기다리 는 아들 앞에서 나도 모르게 “세민이는 좋겠다 명절이 좋아서, 엄마는 안 가고 싶은데..”

속마음이 밖으로 새어 나와 버렸다. 아뿔싸! 해맑디 해맑은 녀석 앞에서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것인가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아까 언급한 대로 ‘다정한’ 아들은 내게 왜 안 가고 싶은지에 대한 질문을 꼼꼼히 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하다 그냥 솔직히 말해줬다. 세민이는 가서 하고 싶은 걸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만 엄마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며 즐겁지 않은 시간을 보낸다고. 너희들 밥 해주는 건 좋지만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하루 종일 음식을 나르고 치우는 일이 싫다고 말이다.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아들이 “엄마도 저 가방(얼마 전 홈쇼핑에서 산 가방. 반품할지 말지 고민하느라 피아노 위에 올려두기를 며칠째) 들고 예~~ 쁜 옷 입고 가서 일하지 말고 있어!” “아니면 고양이 잡는 나만 따라다녀!” 라며 힘을 주어 말했다. 역시 넌 참 다정한 녀석이구나 다시 한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시댁에 가면 난 그 많은 사람들 중 어디에 시선을 둬야 할지 몰라 힘이 든다. 

어느덧 12년 차 며느리인데 어쩌면 시선이 아니라 여태 마음 둘 곳 하나 없어서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늘 최선을 다했는데 매년 적응을 못하는 것 보면 내가 사회성이 떨어지는 건 아닌지 싶기도 했었다. 아마도 나보다 몇 년 빨리 결혼한 형님을 보면서 그런 마음이 강하게 들었던 것 같다. 어머님을 엄마라고 부르고 아버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모습은 내게 정말 충격적이었다. 명절 전날 늘 당직을 서고 피곤함을 온몸에 장착한 채 저녁식사 때나 오는 분.

그 당직은 12년째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며 큰며느리는 왜 안 왔냐는 질문에 병원에 환자가 많아 힘들게 당직 선다는 어머님의 실드멘트도 여전하다. 

사촌형님들에게는 수시로 안부톡을 보내면서도 명절 전날 자신의 부재에 대한 카톡 하나가 내겐 12년째 없다. 친정아빠가 투병한 지 7년째가 되어서야 시댁에 알릴 정도로 시댁과 나사이에는 정말 썸 아닌 섬 하나를 두고 살아왔다. 같은 며느리로 같은 딸의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형님에게서는 그 어떤 위로를 담은 말 한마디 들을 수 없었다. 아빠의 투병이 공개(?)된 명절에 작은 며느리 노래 한번 들어보자는 시부모님과 시댁어른들의 말은 내게 또 한 번의 충격이었다. 




며칠 전부터 울려대는 아빠의 카톡소리에 유난히도 마음이 무거운 명절이다. 

요양병원에 더 이상 있기 싫다는 아빠는 퇴원해 얼른 집에 오고 싶으시단다. 하지만 제대로 걷지 못하는 아빠를 케어하려면 전처럼 엄마가 늘 붙어 계셔야 한다. 아빠가 병원에 계시면서 죄책감에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하루하루지만 막상 아빠가 퇴원해 집에 계시면 이제 일상이 무너져 내리는 하루하루가 된다. 그래서 나는 아빠 편도 엄마 편도 들 수가 없다. 

그 죄책감은 매일 칼날이 되어 내게 불효자라는 낙인을 새긴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아직도 먹구름 가득이다. 차라리 비라도 뿌려대면 좋으련만 어찌 근심 가득 머금고 울지는 못하는 나와 여전히 닮아있다. 

진짜 이번 명절에는 아들 손잡고 고양이 잡으러 다녀볼까?

행복한 상상을 해본다. 

작가의 이전글 너의 사춘기에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