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마흔. 벌써 갱년기는 아닐 텐데 요즘 자꾸만 기분이 가라앉고 불쑥불쑥 눈물이 또르륵 흐르곤 한다. 며칠 전에는 문득 저녁을 하다 진짜 저 밑바닥부터 ‘외롭다’는 느낌이 올라오더니 나도 모르게 장필순 님의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를 찾아 수없이 들었다.
외롭다는 느낌이 들자마자 생각나는 곡이라니... 그 노래가 왜 명곡인지 알 수 있었다.
연애 때부터 소리 내어 우는 법을 모르고 오로지 두 눈 가득 고인 눈물을 그냥 뚝뚝 떨궈 내며 소리 죽여 우는 나를 남자 친구(현 남편)는 안쓰러워했다. 그냥 힘들면 엉엉 울라고 했지만 끅끅 삼키며 우는 게 익숙한 나였다.
살아온 인생이 아직은 소박하지만 그 시간 동안 책임져야 하고 참아내야 할 것들이 참 많았다. 그래서 기쁨보다는 슬픔이 익숙하고, 행복보다는 안정이 편안한 사람이었다.
내 안의 슬픔을 표현하고 그로 인해 안정을 얻을 수 있는 글쓰기가 그래서 난 어린 시절부터 좋았던 것 같다. 내 생각을 글로 적어봤을 뿐인데 잘 썼다는 선생님의 칭찬과 함께 시화전에 멋지게 전시되는 경험은 9살 아이에게는 영광이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그 뒤로 글짓기가 참 좋았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문예창작부, 편집부에서 글과 함께했다. 중학교시절 하교 스쿨버스 안에서 흘러나오던 라디오의 내 사연소개는 엄마에게도 내게도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대학시절에는 학생기자로 3년을 후회 없이 살았고, 기획홍보실에서 근무하면서도 쓰고 읽는 삶은 여전했다.
그러다 결혼과 출산 이어진 육아로 놓고 있던 글을 브런치 작가를 통해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함께 글을 쓰는 동기들이 생겼다.
얼굴 한번 보지 않은 사이지만 무언가 끈끈했고 든든했다. 그중에서 새로운 시작을 하게 해 준 고마운 동기분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200명가량의 동기들이 있는 단톡방은 내가 특별히 무슨 말을 하지 않아도 그 안에 속해있는 것만으로도 따뜻했다. 서로의 일상을 나누고 응원하고 위로하는 사람들이었기에. 시간이 흘러 나도 용기 내 고민을 털어놓아 보았다. 바쁜 일상을 살면서도 여러 동기들의 마음의 답글들이 감사히 채워졌다. 나도 엄마가 처음이라 겪는 힘겨운 마음을 토닥여주고 그들의 격려가 가슴으로 전해졌다.
그런데 그럼 그렇지 내겐 기쁨보다 슬픔이 익숙한 걸 증명이라도 하듯 뭉클한 마음으로 잠들고 일어난 아침 나는 한 줄의 톡을 보고 그 단톡방을 나와버렸다.
자정이 가까워 쓰인 내 무겁디 무거운 글 아래로 아침이 밝아 방장봇의 인사에 넵! 하고 쓰인 답글. 이건 뭐지 나는 로봇보다도 못한 존재인가.. 로봇과 그분의 경쾌한 대화(?)에 위에 쓰인 칙칙한 내 고민이 부끄러워졌다. 그래서 그 길로 그 방에서 줄행랑을 쳤다.
사실은 어쩌면 그곳이 나와 맞지 않음을 느껴왔을지도 모른다. 언제부턴가 이어지는 축하세례에 움츠러들었던 거 같다. 다들 경쟁하듯 저리 열심인데 글 좋아하다는 나 자신은 뭐 하고 있는 건지 초라해지기도 했다. 단톡방에서 지방러로서의 위치를 웃음으로 승화시켜 보고자 시골쥐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었지만 보이지 않는 소외감이 사라지지도 않았다. 그래서 결국 그 시골쥐는 행사날 상경하지 못했다. 하하.
내가 알던 글쓰기는 경쟁하듯 하는 일이 아니었다. 마음이 동하면 끄적이는 거고 그걸 읽고 다른 사람들의
마음이 동요하면 좋은 일이었다. 동감하면 감동하고 감동하면 동감한 것이다. 그게 내가 글을 쓰는 이유다.
내 나이 마흔, 이젠 기쁨에도 익숙해져 보고 행복해도 불안하지 않은 사람이 되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