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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하는양 Apr 28. 2019

2. 왜 그렇게 말끝을 흐리세요

친절한 오진에 관하여 

 어느 날 택시를 타고 동서울터미널로 가 달라고 얘기했는데, 택시기사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면 어떨까? 

 

"동서울터미널에 도착할 확률은 80%입니다. 그중 저녁 7시까지 도착할 확률은 40%, 더 늦게 도착할 확률은 40%이며 10%의 확률로 그 근처에 내려드릴 수 있고 10%의 확률로 터미널에서 오히려 더 멀어질 수 있습니다. 이해하셨습니까?" 


 나 같으면 차가 출발하기 전에 내려서 줄행랑을 칠 것이다. 가면 가고 못 가면 못 가는 거지 저 묘한 확률들은 다 무엇이며 더 멀어질 수도 있을 건 또 뭐야? 충분히 도망간 다음에는 집에 전화를 걸어 이상한 기사를 보았다고 침을 튀기며 얘기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설명이 진료현장에는 그득하다. 그나마 예전에는 '이 질환은 ㅇㅇ입니다. 이 약을 드시면 나을 겁니다'와 같은 단정적이고 믿음을 주는 설명이 많았다면, 오히려 의학이 더욱 발달한 요즘에는 '그 증상은 이래서인 것 같네요. 약을 드셔 보시고 차도가 있는지 보셔야겠습니다' 같은, 다소 자신 없어 보이는 설명이 많아졌다. 그래서 어떤 할머니께서는 '요즘 것들은 실력이 없다'는 명언을 남기기도 하셨다. 대체 그 긴 시간을 투자해서 질병과 인체를 공부했다는 사람들이 왜 그러는 것일까? 이 이상한 현상을 이해하려면 먼저 의학의 특성, 인간의 특성과 의료법에 대한 지식이 모두 있어야 한다. 


 사람은 모든 부문에서 놀랍도록 다양하고 예외가 많다. 사람에 관한 것은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것을 찾기가 힘들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을 확률로 표현하게 된다. 미열과 두통이 있는데 병원까지 갈 일은 아닌 것 같고, 가만히 있자니 힘들어서 편의점에서 타이레놀을 구입했다고 하자. 해열진통제라니 열이 내리고 두통이 가라앉는 효과를 기대하고 그 약을 먹을 것이다. 그리고 편의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의약품인 만큼, 부작용에 대해서는 크게 염려하지 않는 것이 보통일 것이다. 하지만 타이레놀의 설명서를 본 적이 있는가? 놀랍도록 길다. 열이 내리고 아프지 않게 됩니다 한 마디면 될 것 같은데, 무시무시한 부작용에 대해서 그토록 길게 쓰여 있는 것이다. 생후 4개월만 지나도 쓰기 시작하는 부루펜 계열 해열제만 해도 그렇다. 뇌부종이 오는 라이 증후군의 확률이 있다니, 그 확률에 대해 정말로 고심하게 된다면 아기가 열이 나도 해열제를 먹이기가 참으로 부담스러울 것이다. 결국 같은 약을 복용했고, 절대다수가 아무 일 없이 효과만 겪었는데도 (물론 기저 원인이 있거나, '우연히 겹친 경우'가 있었을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 또한 있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타이레놀을 먹고 간 부전이 왔다거나, 아이에게 해열제를 먹였다가 라이 증후군을 봤다는 사람은 주변에서 찾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길 가다 벼락 맞을 확률은 고려하지 않고 길을 가는 것처럼 약을 먹을 때 그런 확률은 무시하고 먹는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약을 처방하고 치료를 권하는 의사에게 있어, 그 작은 확률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다. 좀 더 직접적인 예를 들자면, 필러 시술을 할 때 의사가 위험성을 설명하는 상황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미용클리닉에서 필러의 위험성에 대해 설명할 때 꼭 들어가는 것이 실명이다. 일 년에 그 많은 사람들이 필러 시술을 받는데 피부괴사도 아니고 우연히 안와동맥을 틀어막아 실명에까지 이르는 경우가 얼마나 있을까? 있으면 학회에 보고해야 할 정도로 드물지만 의사들은 그것을 위해 동의서와 설명 양식을 만들고 의료배상보험을 들고 여러 가지 확률을 낮추기 위한 각종 술기 방법을 연구한다. 왜냐면 한 사람이 평생 팔자주름이나 미간 등의 위험부위에 필러를 맞는 횟수는 보통은 많아야 10번 정도인데, 잘 되는 클리닉의 경우 한 병원에서 하는 필러 시술만 20건을 훌쩍 넘기 때문이다. 한 달에 500건, 1년에 6000건의 시술을 한다고 했을 때 해당 클리닉의 5년간 시술 건수는 무려 30000건이 된다. 위험부위 시술 케이스가 1/3이고 실명하는 확률이 0.01% 정도에  불과한다 하더라도 해당 클리닉은 실명을 직접 경험할 수 있게 되는 셈이다. 분명히 받는 사람에게는 무시할 만큼 낮은 확률인데, 시술자에게는 그 기간을 '언젠가'로 잡게 되면 몹시 높은 확률이 되는 것이다. 


 이를 진단하는 상황으로 적용하자면, 확률은 훨씬 더 '불안하게' 작용하게 된다. 학교에 다닐 때에는 80%의 확률로 이런 진단일 것이라는 정보가 있다면 그것은 꼭 외워야 할 정도의 정보였다. 3가지 징후가 있다면 이런 질환을 의심해야 한다,라고 배우면 그 3가지 징후는 이른바 '황금족보'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배운 대로 착실하게 진단해도, 5명 중 1명에게는 돌팔이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 진찰도 세심히 했고, 진단도 분명 배운 대로 했는데 틀리는 순간 잘못한 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배움과 실제가 그렇게 다른 순간이 또 있을까. 이와 같은 확률이라는 것을 감안하고 고려하며 말하게 되면, 저절로 '단언하지 않는' 습관을 들이게 된다. '안전해요', '나을 겁니다', '괜찮아요' 같은 문장들을 아예 쓰지도 않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환자는 늘 정보를 있는 그대로 제공하지 않는다. 유명한 미드 '닥터 하우스'에서 나오듯이, 환자는 늘 거짓말을 한다. 그 거짓말은 부끄러워서 의도적으로 나오는 것이기도 하지만, 정말로 잊어버려서, 혹은 몰라서 나오는 것이기도 하다. '특별히 약물 알러지 같은 것은 없죠?'하고 물었는데 없다고 대답한 다음 주사를 놓자마자 '근데 두드러기는 나요. 그건 괜찮죠?'라고 한다거나(대표적인 알러지 반응이 두드러기다), '열이 없으시네요. 혹시 해열진통제 안 드셨죠?'라고 물었는데 그렇다고 대답한 뒤 진료실을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서 '생각해 보니 30분 전에 타이레놀 2알을 먹었어요'라고 하는 등의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잘못된 정보에 의한 오진도 생각보다 많다. 그러니 '당신의 말이 맞다는 전제 하에 당신의 상태는 이 질병일 가능성이 높습니다'와 같은 애매한 문장에서, 말의 진위를 묻는 것은 실례이므로 앞의 구문이 생략되고, 전달하는 말은 더더욱 애매하고 불명확하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셋째로, 의료행위에 대한 의무 중에는 '설명의 의무'라는 것이 있는데 설명 의무를 잘 수행하지 않았을 때에는 법적 처벌의 근거로 사용될 수 있다. 사실 개정 의료법의 설명의무는 수술, 수혈, 전신마취만을 예를 들어 규정하고 있지만, 실제 소송에서는 그 외의 진단이나 치료 상황에서도 이 설명의 의무를 잘 지켰는지를 참고하고 있다. 설명해야 하는 사항 중에는 기대할 수 있는 효과, 방법, 부작용과 같은 위험성이 포함된다. 그런데 생각보다 인체의 반응은 정말로 다양하고, 일상적인 진료 상황에서 그 모든 것들을 100%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지 설명하는 것이 나쁘다거나 게을리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데 그것을 한정적으로라도 이루기 위해서는 충분한 정보가 필요하다. 진료실에서 상당히 많이 듣는 질문인 '제가 기침을 최근 들어 많이 하는데, 정확한 진단이 뭘까요?'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이에 대해 정말로 완전한 영역의 설명의 의무를 이행하려면, 얇은 책 한 권 분량의 진단명을 읊어야 할는지도 모른다. 왜냐면 기침만으로 진단할 수 있는 사항은 아무것도 없고, 목, 귀, 코를 들여다보고 청진한다고 해도 완전히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벼운 감염성 호흡기 질환을 감기라고 부르지만 그게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로 인한 것인지 리노바이러스로 인한 것인지 세균에 의한 것인지 진찰만으로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심지어 인플루엔자 확진이 나왔다고 해도, 그 기침이 반드시 독감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역류 식도염이 있을 수도 있고 원래 비염이 있었을 수도 있고 진단되지 않은 천식이 있었을 수도 있으며 신경성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것을 다 읊어서 환자를 혼란에 빠뜨리는 것이 의사의 할 일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말인 더더욱 흐려진다.  


 "감기일 것 같네요" 


 95%의 확률로 가벼운 감염성 호흡기 질환일 것 같다는 듯이다. 


 "비염 탓일 수도 있고, 요즘 계속 속 쓰리셨다니 역류 식도염일 수도 있고요." 


 잘 모르겠지만 둘 다 치료해 주겠다는 뜻이다. 


 "글쎄요, 약이 듣는지 지켜보죠." 


 가능성이 20여 가지 정도 되니 일단 약이 듣고 가볍게 낫는지 보자는 뜻이다. 


 진실되게 말하자면 한정된 정보 내에서 오진은 상당히 당연하고 늘  존재하며 심지어 놀랍게도 그것 자체가 잘못도 아니다. 현대 의학은 확진의 측면으로 보자면 아직까지도 걸음마 상태이고, SF에서처럼 펜형 진단기기 하나를 들고 100%의 확실한 진단을 내릴 수는 없다. 그래서 의사들은 늘 말끝을 흐리는 못된 버릇을 갖게 된다.



 몇 해 전 유방 조직검사를 받은 적이 있다. 가족력도 없고, 위험요인도 없고, 젊은 연령이었으니 사실 스스로도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하지만 아토피 피부염이 같이 있어서였는지, 아니면 모양이 세로 방향이어서였는지 무척 고심해서 꼼꼼하게 조직검사를  해 주셨다. 그리고 며칠 있다가 전화를 받았는데, 결과가 양성(=괜찮음)이었음을 설명해 주셨고, 아주 잠시 망설이다가 '안심하셔도 됩니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때 그 고마움이란. 한 순간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셨을까? 정말 다른 가능성이 없을까, 검사 결과는 얼마나 믿을 만 한가, 위험요인도 적고 분명히 괜찮겠지. 하지만 그 사이 어떤 변수가 생겨서 클레임을 걸지 않을까, 하는 것들이 명확하게는 아니어도 구름처럼 쓱 흘러갔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확실하게 말해 줌으로써 환자의 걱정을 덜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조직검사와 같이 확진 상황이 아니어도, 우리는 늘 순간순간 고민한다. '괜찮습니다', '나을 거예요.', '가벼운 질환입니다'라는 말을 쉽게 쓸 수 있는 것인지. 심사숙고해서 나온 말들은 정말로 높은 확률로 믿어도 된다. 하지만 그 말을 하는 순간 화자는 책임을 지게 된다. 정말로 위중할 수 있는 경우가 아니면, '그냥 감기입니다', '가벼운 장염이라 괜찮아요.' 같은 말은 해도 되는 게 사실이지만 문제는 간혹 드물게 틀릴 때이다. 감기인 줄 알았는데  가볍게 지나간 연쇄구균 인두염일 수도 있다. 가벼운 장염인 줄 알았는데 변비에 이은 한 번의 설사일 수도 있다. 어차피 치료가 바뀌지 않는데도 '왜 말이 바뀌냐'며 환자나 보호자가 화를 내는 경우가 당연히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가끔은, 정말로 가끔은.... 간단한 단언이 나름의 친절의 표현임을 가끔은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게임에서처럼 이러이러한 스킬로 인해 피가 닳았네요. 제가 이런 스킬로 힐(heal)해 드리겠습니다,라고 하면 얼마나 간편할까? 


-제 힐이 충분하지 않았다니, [죽음의 화살]은 차단을 좀 해 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연발 어둠의 화살]을 맞으신 겁니다. 힐은 [신의 축복]까지 들어갔어요...... 


생각해 보니, 어차피 게임에서도 쉽지 않다. 

삶은 쉽지 않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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