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으로 세간이 떠들썩하다. 솔직히 나는 작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 마약 관련 범죄가 그렇게까지 많은 줄은 몰랐다. 나에게 있어서 마약은 그저, 여러 병명을 대면서 페치딘 내놓으라고 고함지르는 중독자를 내보낼 때만 잠깐 떠올리는 그런 것에 불과했으니까. 한 번도 궁금하지 않았다면야 거짓말이겠지만, 그렇다고 담배 이상으로 궁금한 것은 또 아니었다. 중학교 때는 커피맛이 궁금했고 고등학교 때는 소주가 궁금했던 그만큼만 딱 궁금했다.
그런데 여기, 사람들이 마약과도 같은 것이라고 거의 확신하면서도 조금도 궁금해하지 않는 것이 있다. 한 번 입에 털어 넣는 순간 평생 먹어야 한다는 끔찍한 약물. 그건 마약사범들이 팔아넘기는 뒷골목의 귀한(?) 약물들이 아니고 바로 흔하디 흔한, 어느 약국에나 종류별로 갖추고 있는 수수한 혈압약이다.
"혈압약은 한 번 먹으면 평생 먹어야 한다던데요. 그럼 안 먹는 게 좋지 않나요?"
이 질문만 보아도 혈압약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이며 사람들에게 깊은 근심거리를 안겨 주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먹는 행위가 복용기간과 연관되다니, 어느 몹쓸 마녀가 만든 저주의 독약 같지 않은가.
그런데 이 질문은 어딘가 잘못되었다. 게다가 그것은 상당 부분 설명해 주는 의사의 잘못이다.
키포인트는 '혈압약'에 포인트를 둘 이유가 없다는 것. 혈압약이 마약도 아니고, 신체적 의존성이 있는 약도 아닌지라 약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설명은 항상, 환자의 '혈압'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당신의 그, 높아져 있는 '혈압' 말이다.
어느 유명한 관심 끌기 좋아하는 일본 의사의 책에도 나와있듯이, 사실상 아무런 문제도 끼치지 않는 혈압은 병으로 규정할 수 없다. 물론 그는 좀 더 자극적으로 기술했다. '고혈압은 병이 아니다'라고.
물론 건강검진 때 혈압이 110/80인 사람은 무조건 혈압으로는 문제를 겪을 리가 없고, 혈압이 140/90인 사람은 대부분 뇌졸중을 겪는다는 말에는 당연히 동의하지 않는다. 사람 몸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고, 검진 시의 혈압의 정확도에도 어느 정도는 문제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확률 싸움 아니던가. 혈압이 높으면 당연히 문제를 겪을 여지가 많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가 나쁜 혈압이고, 어느 정도가 괜찮은 혈압인가?
우리는 24시간 혈압을 재서 평균을 내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날짜의 컨디션이 좋은 시기에 2번 이상 혈압을 재서 2번 이상 혈압이 기준치 이상이면 고혈압이라고 진단을 내린다. 물론 가운만 보면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혈압이 좍좍 올라가는 백의고혈압이나, 커프가 너무 작은 경우 등은 당연히 고려해야겠지만, 적어도 일반적으로는 그렇다. 그렇게 재서 두 번 이상 높으면 문제가 있다고 보는 근거는 대규모 연구이고, 실제로 많은 합병증을 수반할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에 '예방'하려는 것이 바로 치료이다.
그러면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2번 다 정상이라고 나온 사람이 사실은 일반적으로는 고혈압을 앓고 있을 확률은 높아도, 그 반대는 적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왜냐면 평균 혈압만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평소에 설사 낮은 혈압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아무런 이벤트가 없이 혈압이 연달아 높게 측정되었다는 것은 적어도 문제가 있을 확률 자체를 극도로 높일 것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평소에 낮았더라도 올바르게 30분 이상 휴식을 취하고 카페인 섭취와 흡연에 수시간 제한을 두었는데도 혈압이 올라가 있다면 그것 자체도 문제란 말이다. 그래서 그런 식으로 고혈압을 진단해 나간다.
정리하자면,
1. 고혈압을 진단하는 기준은 나름 근거가 있고
2. 반드시 현재의 증상이나 현재의 상황 때문이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가능성이 높은 중대한 위해를 예방하기 위한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고혈압으로 진단이 되었을 때, 치료하려는 이유를 확실히 알아두자.
절대 "현재의 두통을 치료하는 데 고혈압약이 좋아서"라거나, "혈압약을 먹으면 고혈압 자체가 치료가 되므로"가 아닌 것이다(사실, 고혈압이 있다고 해서 본인이 느끼는 증상이 꼭 있는 것은 아니다. 뛰면 누구나 혈압이 올라가지만, 뛰었다고 두통이 생기진 않지 않는가?).
그렇다면 고혈압이 치료가 필요한 것은 확실한데, 다른 방법은 없는지가 화두가 될 것이다.
왜냐면..
1) 누구나 약을 꾸준히 챙겨 먹는 것보다 그렇지 않은 쪽을 좋아하고,
2) 모든 약은 아무리 작은 위해라도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물론 고혈압약과 같이 수십 년 장복해야 하는 약은 사실 부작용이 극히 미미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안 먹는 것보다야 당연히 위해가 있다. 특히 이미 먹고 있는 약이 한 사발이라면, 꺼려지는 것도 당연히 이해가 간다.
그럼 여기서 이런 질문이 나온다.
Q. 약을 먹지 않고 고혈압을 고칠 수 있나요?
이 질문은 핵심적인 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혈압약을 한 번 먹으면 평생 먹어야 하는데...'로 시작하는 질문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럼 약을 먹지 않고 고혈압을 고칠 수 있는가?
물론 모든 가능성을 다 고려한다면, 그리고 지구 상에 있는 수십억의 인구까지 가지 않더라도, 자그마한 도시에 있는 다양한 인간군상만을 고려한다 해도, 당연히 가능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서 짜게 먹던 사람이 싱겁게 먹는 것과 동시에, 살을 한꺼번에 15kg 감량을 했는데, 거기다 안 하던 운동을 시작해서 원래 있던 이상지질혈증(흔히 말하는 고지혈증)이 드라마틱하게 좋아지고, 금연 금주를 즉각 시행해서 완벽한 생활습관 변화를 이룩해냈다면, 당연히 어느 정도는 혈압이 좋아질 것임에 틀림이 없다. 연구에 의해서도 입증이 되었다. 하지만 당연히도 드문 케이스다. 그리고 사람마다 어느 정도 변화가 있을지 예측하기도 어렵다. 그리고 똑같은 얘기를 또 하자면, 상당히 드물다. 애초에 생활습관 자체에 어마어마한 문제가 있어서 혈압이 생겼다면, 그리고 저 정도의 의지가 있는 사람이었다면.... 어디가 모순되는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놈의 의지나 노력 이야기만을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면 이 얘기까지도 가정이기 때문. 당연히 고혈압은 어느 정도의 유전성을 갖고 있고, 이미 시작부터 깡마르고 채식하고 일찍 일어나 운동하는 사람인 경우도 있다.
즉
1. 한정된 집단을 놓고 보자면.... 완전히 고치는 경우도 있다(원래 높아서 병합으로 약을 먹고 있었다면, 단일 제제로 바꾸거나, 먹던 용량을 반으로 줄일 수도 있다)
2. 유전적인, 신체적인, 정신적인, 사회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은 아니다.
3. 가능하다고 해도, 일반적으로 160/110인 사람이 110/80까지 떨어지는 것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또다시 누구나 할 법한 질문이 여기에서 나온다.
Q. 그럼 일단은 생활습관을 고쳐보고, 그다음에 약물치료를 결정하면 안 되나요?
간단하게 대답하자면, 그래도 되는 사람이 있고 아닌 사람이 있다.
그리고 사실, 그렇게 할 이유는 많지 않다.
젊고, 고칠 만한 습관들이 한 눈에도 보이고, 응급 고혈압이 순간적으로도 생기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라면, 일단 약을 먹지 않고 결정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서, 20세의 젊은 여자가 건강검진에서 140/90이 나와서 다시 한번 더 검사했으나 140/95가 나와서 2차 검진을 하게 되었고, 2차 검진에서 142/92가 나왔다면.... 당연히 한 번 시도해 볼 만하다. 왜냐면, 이 사람의 경우 3개월 정도 약 주지 않고 지켜본다고 해서 무슨 일이 그 사이에 일어날 확률은 낮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더 흔한 경우, 즉 160/110이 3번 이상 나와서 병원에 할 수 없이 끌려 나온 100kg의 40대 초반 남자인 경우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약을 먹지 않고 살을 빼고 생활습관을 바꾸어나가겠다고 한다. 물론 그렇게 해서 어느 정도까지는 낮출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도무지 약을 먹지 않을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왜냐면....
1. 약을 먹는다고 생활습관을 못 바꾸는 것이 아니다. 먹으면서 생활습관을 바꾸어나가다가, 엄청난 변화와 함께 낮은 혈압이 측정되거든 약을 끊어보면 된다.
2. 약을 먹지 않고 운동을 한다면, 운동하는 동안에 180/120 정도 나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을까? 운동하는 동안에 뇌혈관이라도 터져 버린다면, 생활습관 교정에 당최 무슨 의의가 있을까?
3. 약을 먹지 않고 살을 20kg를 뺀다 한들, 혈압이 40mmHg 이상이 내려갈까?
결론은 약을 먹지 않는 동안이 위험할 수 있으며, 이 경우 생활습관 교정 이후에도 약물은 필요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이고 약을 먹는 것에 대한 위해는 적으므로 당연히 약을 먹이는 것이 의학적으로 옳다는 것이다.
이로써 방금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이 어물쩍 나와 버렸다.
혈압약은 반드시 평생 먹거나 반드시 같은 용량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혈압약을 먹고 안 먹고는 당신의 혈압에 따른 것이지, 약을 처음 먹고 먹지 않고에 달린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혈압약은 치료제가 아니다. 수시간 혈압을 낮게 유지해주는 약물일 뿐이다. 아침밥을 먹었다고 해서 '영양분이 필요한 상태'가 '치료'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소화되고 나면 배가 고플 것이고 더 굶으면 에너지원이 모자라게 될 것이고... 따라서 점심이든 저녁이든 또다시 밥을 먹어야 하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아침을 한 번 먹었기 때문에 점심을 먹어야 하는 것이 아니고, 항상 에너지원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때그때 밥을 먹는 것일 따름이다. 혈압약 역시 똑같다.
그래서 이제 질문을 바꿔볼 때가 되었다.
"혈압약을 한 번 먹으면, 계속 먹어야 하나요?"가 아니다.
"고혈압이 한 번 생기면, 계속 높은 상태로만 유지가 되나요?"가 맞는 질문이다.
왜냐면, 혈압이 높으면 혈압약을 먹을 것이고, 혈압이 낮으면 안 먹을 테니까!
혈압약은 전적으로 환자의 혈압에만 의존한다. 혈압약은 혈압이 높아서 먹는 것이지 이전에 혈압약을 먹었기 때문에 먹는 게 아니다.
그래서 대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 하지만 어느 정도의 한계는 생각해야 한다는 것.
혈압약은 당신의 혈압이 오늘도 단기적으로, 장기적으로 위험하지 않게끔 지켜주지만, 자꾸 높은 상태로 유지하려는 당신의 몸을 치료해 주지는 않는다.
공익광고식으로 말한다면...
혈압약은 당신을 지켜주되, 당신의 혈압을 조금이라도 치료하는 것은 당신 자신의 행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