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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하는양 May 19. 2019

4. 진료실에는 몇 개의 프로그램이 깔려 있을까?

의사의 사무업무에 관하여 


 은행에서 일한다고 무조건 4시에 퇴근하는 것이 아니고, 교사라고 아이를 가르치는 것 외에 잡무가 없는 것이 아니듯이 의사라고 진료 외에 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의사들도 각기 다른 프로그램과 액티브엑스 때문에, 그리고 수많은 각기 다른 기준들 때문에 진료 외의 업무에 시달린다. 

 내가 하는 사무 업무는 네 가지다. 의료 보험 청구 작업, 영유아검진, 국가예방접종, 금연치료 입력 및 청구 작업이다. 이 4종 업무의 공통점은 국가에서 지원하고 체계화하였다는 것이다. 의료보험 청구는 청구 프로그램을 통해, 영유아검진은 건강보험관리공단에서 '별도의' 프로그램을 통해 지원하고, 금연치료는 역시나 같은 기관인데 또 왠지 모르게 '또 다른' 프로그램을 통해 지원하며, 예방접종은 질병관리본부에서 다시 다른 프로그램을 통해 입력한다. 


 기본 보험 업무에 관해서는 총 3개의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우선 현대사회에서 필수가 되어 버린 전자 차트와 청구를 위한 청구 프로그램, 그리고 삭감 방지 프로그램이다. 이 삭감 방지 프로그램은 대부분 유료인데, 이는 우리나라의 독특한 의료보험시스템 때문에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프로그램 대신 청구사를 고용하는 경우도 있다).

 의료보험에 대해서는 이미 수많은 선생님들이 불만과 고충을 털어놓았으리라 생각된다. 의료보험이 좋은 제도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보험제도에 대한 지식이 의학적 지식과 윤리보다 앞서는 경제적 원칙은 개개 의사로서는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학교 다니는 내내 배운 것들보다, 1) 어떻게 해야 삭감되거나 요주의 인물이 되지 않고 국고를 조금 써서 진료할 수 있는가와, 2) 환자와 보호자의 의료 보험 처리 요구를 중대한 범법행위나 사기행각을 하지 않고 어떻게 가급적 들어줄 수 있는지가 현실에서 필요한 핵심 지식이 되어 버리니 말이다. 이는 다시 더 많은 금액을 지불하면 더 좋은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하는지, 아니면 원천 봉쇄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과도 맞닿아 있다. 예를 들면 국내에서는 헬리코박터 파일로리 균이 있을 때, 1~2주 항생제를 먹으면 위암 확률이 대폭 주는 것을 모든 의사가 알고 있는데도 위험요소가 없는 사람에게 처방하는 것은 의료보험의 기본원칙에 위배되며, 원칙적으로 비급여 처방을 해서도 안된다. 쉽게 말해서 돈 더 내도 못 받는다. 그래서 논란거리가 생기는 것이다.  

 어쨌든 보험이 규정하지 않은 일은 하면 안 되지만, 어쩔 수 없이 하게 될 때마다, 혹은 삭감되지 않는 상병코드를 넣지 않을 때마다 '삭감'이라는 것이 된다. 이 삭감이라는 것은 단순히 내가 받은 금액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내가 국가에서 10000원을 지원받고 환자에게 4500원을 받았는데, 보험에서 금액상 같이 안 썼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약을 썼다면 처방비뿐만 아니라 약값 지원금도 물어내야 한다. 14500원을 받았는데 삭감액이 20000원이 될 수도, 70000원이 될 수도 있다(해당 약이 고가이거나 장기로 처방하는 약이면). 그래서 진료는 있는 대로 보고 적자가 날 수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삭감이 되지 않는지에 대한 노하우가 중요하다. 왜냐면 명문화되어 하나하나 규정되어 있지 않아서 '감'과 소문으로 처리해야 하는 경우들이 많기 때문이다. 흔히 의사들이 이 알 수 없는 제제를 비꼴 때 말하는 '심평의학'이라는 것은 사실 비슷한 의료보험 시스템인 일본에는 심평의학 서가가  따로 있을 정도로 정립이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어떨 때는 삭감이 되고 어떨 때는 안 되는 데다가 왜 삭감이 됐는지 납득이 안 갈 때도 있다(의의 신청이 있는데 여기에 구구절절 써서 보내면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그래서 여기서 다시  프로그램이 등장하는 것이다. 바로 삭감 예상 프로그램이다. 그래서 전자 차트 프로그램, 청구 프로그램, 삭감 예상 프로그램 이렇게 3개가 필요하게 된다. 


 그다음은 영유아검진 프로그램이라는 것이 있다. 검진 프로그램의 확대로 인해 영유아검진이라는 것이 생겼는데 이 영유아검진이 다시 어린이집 사업과 연계되어 있어서, 검진을 받지 못한 아이는 어린이집에 다닐 수 없는 모양이다. 4개월부터 시작되는 이 검진은 프로그램이 복잡하기 짝이 없어 보호자도 의료진도 고역인 면이 있다. (다만 많은 선생님들과는 달리, 나는 프로그램화 자체는 찬성이다. 표준화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고, 최소한 이러이러한 항목은 관찰을 해달라는 의미도 되니까) 일단 이 프로그램은 검진만을 위한 프로그램이지만 여러 검진이 다 같이 믹스되어있는 패키지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유로 디폴트가 몇 해 전 구강검진으로 뜨기도 해서 고생스러울 때가 있다. 보호자 입력도 복잡한데, 왠지 모르게 발달평가입력지와 건강검진문항입력지가 따로 설정되어 있어서 비밀번호를 따로 설정해야 한다. 대부분은 이 번호를 3~4번 정도는 틀리고, 아예 기억이 안 나서 입력을 다시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시스템을 프로그래머나 앱을 늘 사용하는 사람들이 아닌, IT기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 기준으로 맞추어 단순화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접수처에서 대상자 등록을 하고 보호자의 문항 입력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져서 정보를 불러오는 것에 설명하면, 병원에서는 측정치를 프로그램에 입력한다. 근데 여기서도 또 프로그램 오류가 나서, 측정치에 대한 백분위가 안 뜬다거나, 양호 입력이 안 되는 경우가 있다. 환장할 노릇이다. 프로그램을 끄고 다시 켜야 한다. 개인정보보안에 관한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리로드할 때 다시 의료기관인증서를 이용해서 로그인을 하고 프로그램을 다시 띄워서 다시 불러온다. 창을 2개를 띄우고 발달평가 점수를 매겨 결과를 입력하고 예방접종연동 프로그램 항목에서 접종을 확인한다. 그리고 문항들을 파악한 후 검진을 하고, 다시 입력해서 오류점검을 한 후 해당 교육지와 검진표를 출력한다. 한때 소아청소년과 선생님들이 영유아검진을 거부하겠다고 목소리를 냈었는데 이해가 조금은 갈 법하다. 소아청소년의 발달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고, 이미 의료보험 청구시스템이 기존에 존재하는데 왜 별도의 프로그램을 사용해서 긴 시간을 투자해 원래 하던 것을 해야 하냐는 것이 골자였다. 사실 돈이 되는 것도 아니어서 오히려 검진이 많으면 매출이 줄어들고 더 많아지면 적자가 날 수 있을 정도라 그랬을 것이다. 오류 몇 번 나면 20분 이상은 걸리는데 특히 프로그램 특징상 두 명 동시진료(형제 자매)일시 창이 동시에 안 떠서(무슨 업데이트를 했는지 이제 건강문항도 2개가 안 뜬다) 더 오래 걸린다.  


 /전혀 다른 얘기지만, 나는 건강검진이나 발달평가 문항도 국내 실정에 너무 안 맞는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 첫째로는 '할 수 있는 편이다'와 '잘할 수 있다'의 경계를 명확히 하지 않아 한국인 특성상 전부 '할 수 있는 편이다'로 입력하는 경우가 많은데 심지어 그걸로 발달장애와 정상의 경계가 갈린다는 것. 둘째로는 아이가 주로  학습해야만 알 수 있는 정보들을 학습을 전제로 알고 있는지 묻는 문항들이 너무 많다는 것. 셋째로는 스마트폰으로 사용하느라 전화번호를 외우지 않는 경우가 많아지는 요즘 세태와, 자녀들에게 일부러 리모컨 사용법을 잘 알려주지 않는 시대 분위기의 반영이 안 되어 있다는 것(그리고 예전에는 리모컨 사용이 전원 켤 수 있느냐 정도였다면 요즘은 추가로 셋업박스를 켠다거나 스마트폰연동을 사용한다거나 하는 경우가 많아져서 난이도도 같다고 볼 수가 없다), 그리고 몇몇 문항은 미국의 것을 베껴오느라 문화적 이해가 안 된 것 같다는 점 등이다(육아서적도 비슷한 문제를 포함하고 있는데, 부모와 아이가 같은 공간에서 자고 생활하는 것이 좋다는 말을 우리나라에서는 같은 집이 아닌 한 방에서 품에 품고 생활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예전에 비해 너무 기준 자체가 올라가서, 이전에는 7살 때 처음 해도 이상하지 않은 일들을 4살쯤에는 완료해야 하는 느낌마저 든다. 그렇다고 이전 아이들은 모두 발달장애였냐면 그렇지는 않으니.../


 국가예방접종은 다시 별개의 프로그램인데, 이 프로그램은 그나마 내가 제일 좋아하는 프로그램이다. 공인인증서로 로그인하면 깔끔한 프로그램으로 뜨는데 주민번호만 입력하면 접종내역과 LOT번호(제조번호)가 뜨고, 적기접종이 언제까지인지도 뜨고 몇 가를 맞았는지에 따라 칸도 나뉘어 있어 실수를 예방하게 되어 있다. 부작용 신고도 프로그램을 통해 할 수 있으며 부작용이나 다음 접종 시기도 문자로 알려주도록 설정하기가 쉽다. 다만 단점이 하나 있다면 2시간마다 새로 로그인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시술하고 돌아오거나 점심을 먹으면 여지없이 튕겨있다(이것도 늘어난 건데 30분 정도였다가 2시간이 되었다. 얼마나 많은 민원이 들어갔을지 짐작할 만하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청구도 자동으로 되고 엑셀 파일로 저장할 수 있다. 다만 청구가 몇 달씩 늦어지거나(우리는 임금이 늦으면 노동청에 신고당할 텐데 나라는 몇 개월씩 연체하고도 이자도 주지 않는다ㅠㅠ) 금액 산정이 오래오래 걸리는 경우가 많다. 

 여담으로 나는 가정의학과다 보니 많은 소아 부모님들이 소아과와 백신이 다를 것이라고 의심하고 불안해하는데 똑같다. 폐구균 같은 백신은 심지어 보건소에서 할당량을 주는 것이고, 나머지 백신도 이전 접종을 프로그램에서 확인하게 되어 있다. 귀찮아서 대충 하지 않느냐는 시선도 있는데 귀찮아서 안 되는 교차접종을 한다거나 다른 접종을 하면 병원에서는 청구가 불가능하므로 그런 의심은 안 해도 된다. 접종 자체는 단순 업무고(놓아야 하는 위치만 중요하다. 신경은 피해야 하니) 거의 모든 근주 백신들이 생각보다 높은 확률로 국소 부종이 생길 수 있다. 이상하게 부모님들은 소아과에서 접종하고 부으면 '백신'이 이상하다고 하고, 가정의학과에서 접종하고 부으면 '역시나 그 병원은 주사를 못 놓아서 후회된다'라고 깨알같이 인터넷에 후기를 올리곤 하는데 접종 시기의 면역반응 차이일 뿐이다. 국소 부작용이 없게 하는 특수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실 전혀 붓지 않았다고 해서 항체 생성률도 우수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마지막으로 요양기관정보마당이 있다. 이 프로그램은 홈페이지로 접속해서 공인인증서를 사용하면 뜨는 프로그램이다. 항목이 너무 많아서 처음에는 가장 헷갈리는 프로그램이고, 아주 올드한 인터페이스 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는 가장 꺼려하는 프로그램이다. 금연치료를 하려면 자격조회를 하고, 문진표 항목을 입력하고, 스마트폰 발송 체크를 한 후 1~3 차수 입력을 하고 저장을 하면 옆창이 활성화되는데 거기서 다시 기본항목을 입력하고 내 면허번호 조회를 한 후(금연교육 이수) 상담 입력을 끝내야 처방입력을 할 수 있다. 근데 처방전 세트도 방식이 묘해서 예전 386 시대 프로그램 느낌이 난다. 수정을 눌러야 클릭이 되고 그다음 다시 완료해야 바뀌는 식이고 다 저장하고 출력하면 된다. 이 프로그램에서 출력을 해야 하니 바로 진료실에서 출력을 하게 되며 자필 사인을 해서 건네주면 되는데, 이 과정도 사실 앞에서 하고 있기가 여간 뻘쭘한 것이 아닌데 심지어 다시 전자 차트 DUR 점검이라는 것을 통해 따로 입력하고 그다음에 지워야 한다. 솔직히 말해서 무슨 짓인지 모르겠다. DUR 프로그램을 통해서 약물 사용내역을 확인해서 상호작용을 확인하라는 건데 정작 청구는 의료보험청구랑 같이 하면 이중청구가 돼서 다시 지우든지 해야 한다. 왜냐면 이건 청구도 프로그램을 통해서만 해야 되기 때문에... 그럼 다시 데스크에 수납액을 프로그램에서 확인하고 알려줘야 한다. 그래서 슬쩍 프로그램이 하나 더 나왔는데, 데스크 및 행정/원무과와 소통할 사내메신저가 하나 필요하다. 

 그리고 이 차수라는 것도 복잡한데 지원금이 한 번에 12주, 1년에 3 차수 같은 식으로 되어 있는데 종료일과 차기 차수일을 같이 설정할 수 없어서 날짜를 옮겨야 한다. 약은 허가사항이 원래 개월 단위인데 대체 왜?! 어쨌든 하라니 한다. 


 그래서 이 업무들을 위해서는 총 7개의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그리고 은근슬쩍 깔리는 애드온 급의 DUR도 공인인증서로 로그인이 필요하다. 




 로그인 지옥은, 진료실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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