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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하는양 Apr 23. 2019

1. 통증 그리고 공감


 아픔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모호한 개념이다. '찌르는 것 같다', '때리는 것 같다', '뭉근하다', '화끈거린다', '아리다', '전기가 오는 것 같다' 등 표현하는 말이 무척이나 많은 것만 봐도 그렇게 간단하게 표현할 개념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거기다 주관적이기까지 하다. 같은 자극에 대한 통증 반응 자체도 다른데, 그것을 인지하는 과정까지 통증의 정도에 영향을 미치니 환장할 노릇이다.

 

 "다들 꾀병이라고 했는데, 전 정말 아팠거든요. 방방곡곡을 찾아다녔어요. 교수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환자가 이 말을 했을 때가 학교에 다니면서 교수님이 가장 멋있었던 순간이었다. 섬유근통 환자였는데, 늘 여기저기가 아프다고 하고 약을 먹어도 소용이 없다고만 하니 가정에서도 골칫덩이가 된 것이었다. 지친 가족들은 꾀병이라며 외면했고, 환자는 더한 고통에 시달리며 의사, 한의사, 민간요법 전문가(?)를 가리지 않고 만나며 전국을 돌아다녔던 모양이었다. 통증을 인정해 준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경감까지 시켜주니 그에겐 교수님이 구세주였던 셈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받고, 몸도 아픈데 마음에까지 상처를 입곤 하지요. 고생 많으셨어요. 이제 훨씬 덜할 겁니다.'


 교수님은 담담하게 위로를 했고, 나는 이래서 의사를 하는구나 하며 더더욱 감탄했다. 그리고 모든 의사들이 그렇게 하는 줄만 알았다. 그런데 그 공감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많이 힘든 일이었다.


 응급실에서 당직을 서던 레지던트 시절, 유명한 '단골 할머니'가 있었다. 119에 실려와서 '아파! 아파서 당장 죽을 것만 같아!' 하고 외치시던 분이었다. 그리고 어디가 아픈지 물으면 대답을 안 하고, 손이라도 잡아 드리면 그제야 '마음이 아파....' 하고 말씀해 주시곤 했다. 응급실에라도 오지 않으면 자식들이 연락도 안 한다며 슬퍼하던 분이었는데 그 일이 반복되자 자식들도 전화를 잘 받지 않았다. 어쩌다가 연락이 되면 '아... 지금 산속이라 연결 상태가..... 지직.... 딸깍' 하고 누가 들어도 설익은 연기를 한다거나,  '어휴, 또 가셨어요? 음... 전화 잘못 거셨습니다.' 하고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하며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렇게 전화를 받지 않자 응급실에 그만 오시게 되었다. 그 아픈 마음을 누군가 알아주었으면 좋으련만. 그 통증은 자식들도 공감하지 못했던 것이다.

 

 여기서 공감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 전에,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동감과 공감이 비슷한 듯하면서도 몹시 다르다는 사실이다. 동감은 같은 것을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픈 사람을 보고 같은 아픔을 느끼며 이 고통을 빠르게 해소하고 싶다는 절박한 생각을 함께 하는 것이다. 반면 공감은 같은 것을 느끼기보다 그 감정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 둘은 비슷하면서도 다른데, 육아전문가와 마찬가지로 의사는 동감은 하지 말아야 할 것, 공감은 꼭 해야만 하는 것으로 배우고 구분한다.

 

 예를 들어 내가 처음의 섬유근통 환자의 배우자라고 생각해 보자. 내가 동감을 할 경우, 나는 그 아픔을 알거나 적어도 알고 있다고 느끼며, 절박한 마음에 같이 방법을 찾아보게 될 것이다. 굿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에 점집을 찾아보기도 하고 어디서 좋다는 음식에 대한 말만 들으면 먹여 보는 것이다. 설명을 듣다가 절박한 자신에 비하면 무미건조한 의사의 말투에 '동네 장산데 이렇게 할 거야? 소문 다 낼 거야!' 하며 버럭 화를 내며 나가 버리기도 하고, 남의 고통도 몰라 준다며 자식을 원망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동감은 환자에게 잠깐의 위안은 될지 몰라도 근본적으로나 장기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반면에 공감은 아픔을 이해하되 도움을 줄 수 있는 만큼의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다. 응급실 단골 할머니의 아픈 마음에 공감해 본다면, 열심히 키운 자식들이 돌아봐 주지 않고 혼자 사는 빈한한 삶의 외로움을 이해하지만, 응급실에 와서 다른 이에게 전화를 걸어달라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 후 혹시라도 응급에 해당하는 증상이나 질환이 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고 우울증에 해당하는 증상이 있다면 진료와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안내해 드려야 한다. '같은 마음'일 때는 오히려 내밀 수 없는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추가로 짚고 넘어가야 할, 공감보다 더 중요한 지식들이 있다. 바로 비응급과 응급, 증상 조절만으로도 괜찮은 것과 반드시 원인을 알아봐야 하는 통증을 가르는 기준점들이다. 우선 두통일 경우 적색신호(red sign)라는 것이 있으며, 놓치기 쉬운 몇 가지만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1) 만 40세 이후에 갑자기 생긴 두통

2) 이전과는 다른 양상의 두통 

3) 평생 처음 겪어보는 강도의 두통

4) 아침에 두통 때문에 잠에서 깸 

5) 기침하거나 자세를 바꾸면 심해짐 


사실 그 외에도 기준은 많지만, 그래도 대부분은 본인도 이상하게 생각할 만한 것들이다. 잘 걸을 수 없다거나, 신경에 문제가 있다거나, 시작한 지 몇 분만에 최고조에 이를 정도로 진행속도가 빠르다거나, 심한 구토나 발열 등의 동반 증상이 있다거나 등등.


 복통일 때는 일반적으로 발열 여부, 압통점 여부가 그 기준이 된다. 열이 전혀 나지 않고 한 군데가 아픈 것이 아닌 전반적인 통증은 일단은 응급으로 보는 경우가 거의 없다. 다만, 지속적인 소화불량이나 체했다고 말하는 그 느낌이 2주 이상 되었다면 내시경을 권유하는 편이다. 우리나라는 내시경이 비싸거나 절차가 복잡한 편이 아니라 받는 것이 이득이기 때문이다.

 간혹 특이한 경우가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은 고령자의 복통이다. 응급실에서 오토바이를 타다 넘어져 다리가 다친,  피가 철철 흐르는 청년을 놓아두고 '속이 안 좋다'는 어르신을 먼저 보는 일이 있는데, 고령의 경우 심근경색(흔히 말하는 심장마비)이 왔는데도 '명치가 아파서 소화제를 먹었더니 조금 나아졌다'라고 하는 경우가 꽤 있고 전형적인 증상을 그다지 호소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진료하는 것이다. 또는 뇌졸중이나 심근경색의 기전과 비슷하게 장에 영양을 공급하는 혈관이 막혀서 장이 썩느라 아픈 경우도 있다. 잡아내기가 상당히 힘든데(장비가 없는 경우나 환자가 CT를 거부하는 경우 의심하기도 힘들다) 놓치면 반드시 사망으로 이어지므로 중요하게 봐야 한다. 


 통증이 있는 것을 오히려 더 가벼운 질환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유방에 멍울이 만져질 때 사람들은 아픈 경우 가장 걱정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가벼운 염증이나 주기적으로 생기는 자연적인 멍울인 경우가 많고 사실은 전혀 아프지 않은 딱딱하고 불규칙한 덩어리가 훨씬 위험한 것이다. 


 끝으로, 아까 예를 들었던 섬유근통은 통증에 '민감해지는' 증후군들 중 하나이다. 예민하고, 피로감을 호소하고, 불면증에 근육의 뻣뻣함까지 토로하니 그야말로 흔한 노화현상이나 꾀병으로 생각하기 쉬운 증상들은 다 갖고 있는 셈이다. 두통에 소화불량, 건망증 등까지 호소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증후군은 통증점의 개수와 증상 유지기간이 진단기준에 들어가 있으며, 만성피로증후군이나 골관절염 등 다른 증후군이나 질환군을 배제해야만 진단할 수 있다. 따라서 흔한 증상들에 심지어 치료제까지 항우울제지만 사실은 이 증후군의 환자들은 분명한 '통증이 있으며' 그것은 단순한 정신적인 문제거나 노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증상들의 집합이 아닌 것이다. 이 증후군을 예로 든 이유는 의사로서 공감이 얼마나 힘든지 절감할 수 있는 경우여서였다. 보호자도, 의사도, 심지어 환자 본인조차도 있는 통증을 있다고 인정해 주기도 어려운 그런 것이기에. 


공감은 어렵다. 필요한데도 어렵고 전문가에게도 어렵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어렵다. 게다가 통증이라는 것은 그 안에 심각할 수 있는 여러 함정이 있고 존재 자체가 가짜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우리는 해야 한다. 우리는 누군가에게는 조언자이고, 동반자이며 또 보호자이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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