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폭탄

"요즘에 나 머리가 멍해. 슬럼프인가봐."

학원에 다녀온 딸아이가 11시에 밥을 먹다가 한마디 불쑥 내뱉습니다.

"무슨 슬럼프? 뭐에 대해?"

무슨 이야기인가 싶어 아이 앞에 바짝 다가앉았습니다.

"꿈이 없어. 뭘해야 할지 모르겠고. 목표가 없으니까 힘이 빠지는 기분이야."

공부하고 있는 아이가 갑자기 무슨 말인가 싶었습니다.

"공부하고 있잖아. 공부에 대한 목표가 없다는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공부는 그냥 하긴 하는건데. 그것말고 뭘해야할지 모르겠어. 내가 하고 싶은건 아이돌이거든.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얼굴이 너무 안예뻐서 아이돌이 힘들꺼 같아."

아이 눈에서 눈물이 한방울 떨어집니다. 특출하게 예쁜 건 아니지만 얼굴이 못나서 아이돌 못할 정도는 아닙니다.

"얼굴은 오히려 괜찮아. 수술하면 되잖아. 노래나 춤실력이 문제지."

평소에 노래도 잘 못 부르고 춤에도 끼가 하나도 없는 아이라 내가 생각하는 문제는 달랐습니다.

"노래나 춤은 열심히 하면 되잖아. 하지만 성형수술은 한번 잘못했다가 실패하면 어떻게 해. 고칠 방법이 없잖아. 그게 너무 두려워. 내가 하고 싶은 건 어려운 것 뿐이야. 이룰수가 있는게 하나도 없으니까 너무 막막해.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 공부는 하면 될 거 같긴 한데 공부는 내가 하고 싶은게 아냐."

말려들지 말아야할 사춘기 아이의 무한 반복 루트에 빠져버렸습니다.

"죽어도 아이돌이 되고 싶다면 성형수술의 두려움도 이겨내야해. 그것까지도 아이돌 세계를 준비하는 것에 포함되는 거니까. 목표가 너무 높아서 어려울 거 같으면 목표를 내려. 아니면 어려운 목표를 향해 죽기살기로 매진하던가. 나는 도대체 뭐가 걱정인지 모르겠는걸. 아이돌이 못될거 같으니까 자기 스스로에게 핑계를 대고 있는건 아닐까?"

아이가 아이돌이 꿈이라는 이야기를 꺼낸건 이주전입니다. 코로나에 걸려 홀로 방에 두었더니 하루종일 스마트폰만 하더군요. 그러더니 갑자기 아이돌이라는 꿈을 만들어 낸겁니다. 중간고사의 압박은 다가오고 그걸 이겨내기 위한 방편으로 다른 이상향을 만들어 낸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이돌 말고 하고 싶은게 뭔데? 아이돌 말고 왠만한 건 공부하면 이룰수 있는 꿈이야. 그런데 끝까지 노력해보지도 않고 뭐가 어렵다는 거야. 네가 공부 한다고 학원다닌지 두달밖에 안됐어. 그것도 내가 겨우 설득해서 보냈지. 그게 아니었다면 너는 지금도 그전처럼 매일 스마트폰만 새벽까지 하다가 잠드는 게 일과였을 거야. 공부는 할만 할거 같다고. 그럼 공부에서 제일의 성과를 내봐. 할만한 것부터 그렇게 도전해 보는 거지. 그것도 안해보고 잡을수도 없는 꿈을 향해 손을 뻗으며 어렵다고 한탄만 하는건 아닌거 같은데. 네가 아이돌에 관심이 있었다면 너에게 주어진 그 학원이외의 시간에 찾아보고 연습했을거 같아. 그게 그렇게 간절하다면. 하지만 너는 새벽까지 스마트폰만 보면서 허황된 꿈만 꾸고 노력은 1도 안했잖아. 그러면서 꿈이 너무 이루기 어렵다는 말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나는 대화가 안되는 아이와 대화하며 점점 언성이 높아졌습니다. 그리고 아이에게 스마트폰 비밀번호를 풀게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는 하루에 유튜브를 평균 네시간 이상 보고 있었습니다. 스마트폰 사용시간이 여섯시간이 넘었습니다.

"내가 멍해진게 코로나 걸리고 나서인것 같아. 나도 공부하려고 노력하고 있어. 졸릴 때 안졸려고 애쓰고 있다고."

"왜 졸릴꺼라고 생각해. 새벽 두시까지 잠을 안자고 스마트폰만 하니까 졸린거야. 내가 너한테 두달 넘게 아무 제지도 안하고 지켜보고 있었어. 그랬는데 그 결과가 이거니? 네가 알아서 하겠다고 해서 믿고 맡기며 지켜본거야. 네가 조절할수 있을 거라고 믿었어. 그런데 결과가 겨우 이거야? "

나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누르기가 어려웠습니다. 오늘도 하교 후에 낮잠을 자다가 학원에 한시간이나 늦었습니다. 어젯밤 12시에 하릴없이 스마트폰만 잡고 있는 아이에게 그만 자라고 분명히 말하고 잤지만 아이는 내 말을 듣지 않은 겁니다. 노력은 하나도 하지 않고 이상향만 높은 아이가 너무 한심했습니다. 자기는 하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지만 결코 아무것도 노력하지 않는 아이의 모습이 기가 막혔지요. 공부는 쉬울꺼 같다고 말하는 그 거만함이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건지 알수가 없었지요.

"스마트폰은 이제 내가 비밀번호 패턴 걸거야. 네가 하루에 한시간 반만 한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공부가 할만하고 쉬운거 같다면 거기서 한번 최고가 되봐. 그리고 나서 다음 더 높은 꿈을 향해 도전하면 되겠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나는 할수 있다느 자만은 굉장히 위험해. 실제 행동하지 않고 입으로 하는건 누가 못하겠니. 너 정도 공부는 누구가 다 해. 거기서 최고가 되지도 못하면서 공부가 쉽다는 말 하지마. 그럼 넌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아이돌도 마찬가지야. 그렇게 그 꿈이 절실하면 잠을 줄여서 춤을연습하고 노래를 불러야지. 하나도 안하면서 네 꿈이 절실하다는 이야기를 누가 믿을 수가 있겠니."

한참을 다다다다 쏟아부었습니다. 그러고도 분이 안풀렸습니다.아이는 몇번이나 더 자기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런 아이와 대화가 될리가 없었지요.

"어제밤에 왜 그렇게 화를 냈어?"

남편이 일어나자마자 나를 붙잡고 물었습니다.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쪼르르 일러바쳤지요.

"중학교 2학년 사춘기 아이가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을거라 생각해? 그걸 그렇구나 하면 되지 사사건건 따지고 들면 논리가 통할리가 있나. 아이가 논리적이지가 않은데."

남편말이 맞았습니다. 하지만 내 편을 들어주지 않는 남편이 야속했습니다.

"그래 다음부터 딸이 이야기 시작하면 당신에게 보낼께. 너무나 이성적이고 아이를 이해하는 아빠랑 이야기하는게 좋겠다고."

아이와 대화만 시작하면 나보다 더 싸움으로 치닫는 남편의 훈수에 기분이 상해서 뾰족한 말로 응수했지요.

출근준비를 하고 아파트를 나서는데 뒤통수가 싸늘한 기분입니다.

'뭐라고 중학생에게 논리를 가르쳐준다면서 그렇게 흥분하며 화를 냈을까. 아이는 결국 내 메시지의 내용보다 엄마가 화냈다는 사실만을 기억할텐데. 그냥 아이가 슬럼프야 하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들어줬으면 좋았을걸. 내자식이 아니었으면 몇번이고 참고 넘길 수 있을 이야기였는데 참지 못했어. 너는 실력이 없어서 아이돌이 될 수 없을 거라는 팩트폭행이나 날렸지 . 괜히 말시작해서 아이에게 상처나 주고 참 못났다.'

어제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모르겠습니다. 괜히 기분도 안좋고 몸도 안좋고 라면이나 인스턴트 식품이나 왕창 때려먹고 싶은 날이었지요. 거기에 딸아이가 잘못 걸려든 겁니다. 이상하게 화가 나고 이상하게 욱하게 되는 날들의 연속입니다. 내 친구들이 속속들이 갱년기 진단을 받는다는데. 나 역시 그런걸까요. 그럼 이 넘쳐흐르는 화를 나는 도대체 어떻게 풀어내야 할까요. 늘 내 곁에 있는 가족에게 쏟아부을수는 없을 텐데요. 도무지 친절해지지 않는 낯선 내 자신과 하루 하루 만나는 것이 나 역시 어렵습니다. 참말로 어렵습니다.

'진짜 슬럼프는 지금 내가 겪고 있다. 임마. 몸은 점점 제 기능을 못하고 여기 저기 아파오지. 머리는 안돌아가는데 하고 싶은 건 많지. 나 역시 너와 다르지 않아.'

한바탕 울고 싶은 건 아이 뿐만은 아닙니다. 길을 잃은 채 헤매이고 있는 것 역시 나도 마찬가지니까요. 아이와 나는 어둡고 캄캄한 터널을 얼마간 돌아다녀야 하겠지요. 거기서 얼마나 서로 모진 말로 상처주고 상처받을 까요. 벌써부터 정신이 아득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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