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일초 화분을 구입했습니다.
하루에 하나씩 꽃을 피우다는 일일초는 참 여리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있었지요.
평소에 꽃나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꽃이 피어 있을때는 황홀하지만
꽃잎이 질때의 그 초라함이 너무 싫었거든요. 피었을때와 전혀 다르게 보기 흉하게 떨어지는
꽃잎이 싫었는데요. 일일초는 떨어지는 꽃잎만큼 잎을 내어준다니 용기 내어 구입을 한 게지요.
그런데 왠걸요. 올라오는 꽃보다 떨어지는 초라한 꽃잎이 많은 건 일일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랬겠죠. 아무리 새 꽃을 내는 식물이라 해도 새로 만드는 에너지가 더 많기는 쉽지 않을 테니까요.
일일초를 보며 지금 떨어지고 아플 나이인 내가 받은 싶은 건 어쩌면 위로였구나 싶었습니다. 아직 새 꽃을 내고 싶다는 욕심도 있었겠지요. 느릴지언정 새 잎을 낼 수 있다는 희망을 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지고 초라한 형체만 남을 갱년기가 나에게 다가오고 있으니까요.
그동안 인생을 살면서 흐드러지게 피기 위해서 노력하고 애썼지만 그다지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지 못했습니다. 언제나 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서 고민해봤지만 남들과 다른 흐드러진 꽃을 피우는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요. 남들보다 특출하기는 커녕 남들보다 낫다는 소리한번 듣지 못하고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지라고 하네요. 그게 또 서럽습니다. 아직 다 보여주지도 못했는데요. 자리를 빼라니요. 나는 그게 못내 싫어서 다시 꽃을 피울 준비를 하는데요. 예전만큼 빠릿빠릿하게 준비되지도 않고 움직여지지도 않아요.
"있잖아. 40대때 친구들을 만나면 누가 승진하고 잘나가고 잘살고 이런 얘기만 했었거든. 이제 50중반 넘어가니까 다 소용없더라. 아무도 그런얘기 안해. 누가 잘 나간다고 해도 별관심도 없어. 이제 몸관리하고 건강하고 천천히 여유롭게 세상을 즐기는 이야기들만 나눈다우. 세상에 잘났다고 으스대 봤자 별거 아닌데. 그게 중요한게 아니란 걸 이제는 아니까. 그런 말들 들으면 그저 웃지. 정말 중요한것들을 놓치고 있구나 싶어지고."
몇일 전 만나 50대 선생님이 온화한 미소로 들려준 말입니다. 자식을 키우는 것도 회사에서 잘나가는 것도 다 부질 없더랍니다. 아이들은 그냥 놔둬도 자신이 가진 그릇만큼 잘 크고요. 회사에서 승진보다 중요한 것이 좋은 사람들을 얻는 것이라구요. 이건 단지 그 선생님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만나는 모든 50대 이상의 어른들이 한결같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이지요. 하지만 아직 삶이 무르익지 못해서 일까요. 나는 손에 쥔 것을 놓기가 여전히 여럽습니다.
"몸이 아프면 아프다고 왜 말을 안해. 그러면 배려받을 수 있잖아."
남편이 얼마전 친구들 모임에 간다길래 내가 건넨 말입니다. 대학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 만납입니다. 모여서 대학때처럼 술마시고 당구치고 담배피고 논답니다. 함께 한 세월이 30년이 다 되가지만 모여서 하는 일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지요. 여전히 스무살때처럼 술을 마시는 친구들을 보며 매번 남편은 놀랍니다. 남편은 체력이 예전만 못하니까요. 그래서 친구들에게 나는 몸이 안좋고 컨디션이 안 따라줘서 안되겠다고 말을 하라니까요. 그 말을 못하겠답니다. 물론 여러번 만남에서 그런 뉘앙스를 보여줬더니 술마시기를 강요는 안하지만요. 여전히 남편도 자신들처럼 마시고 놀길 기대하나 봅니다. 그러니 더이상 말을 꺼내기가 어려운 모양입니다. 친구들은 자신들의 페이스대로 따라오지 못하는 남편과 만남이 즐겁지 않을거에요. 매번 배려하고 함께 즐기지 못하니까요. 남편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자신의 상태를 충분히 배려받지 못하고 친구들이 노는게 탐탁치 않으니까요. 서로 스타일이 달라졌으면 같이 놀지 않으면 될텐데 남편은 그것도 못 놓습니다. 스무살부터의 친구인데 어떻게 손을 놓느냐구요. 하지만 같은 소재나 대화의 주제도 없어진 친구들 사이에서는 시덥지 않은 농담들만 오갈뿐입니다. 남편은 친구들과의 만남이 점점 재미없어지면서도 그 모임을 놓지 못합니다. 그것마저 사라지면 젊었을때 만났던 친구 모임이 없으니까요. 그 모임을 놓치면 마치 자신의 스무살 추억도 사라지는 양 남편은 모임을 꾸역꾸역 챙깁니다. 하지만 재미도 없고 공감도 사라진 모임은 무의미한 시간 때우기 이상의 의미는 없었지요.
시절인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평생친구인줄 알았던 대학교 친구가 있었는데요. 마흔이 다 되도록 그렇게 말이 잘 통할 수가 없는 친구였습니다. 내가 죽을 때까지 내 곁에 있어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었지요. 그런데 어느 순간 친구가 나에게 서운한 일이 있었습니다. 내가 수술을 해서 병가를 냈거든요. 누구를 만날 상황이 아닌데 친구가 자꾸 만나자고 하는 겁니다. 병가를 내서 시간이 많으니까요. 치질 수술에서 자꾸 염증이 생겨 제대로 앉지도 못했던 나는 몇번이나 만남을 거절했습니다. 그게 못내 서운했던 모양입니다. 그때부터 내 연락을 마치 빚쟁이나 보험 상담사 전화처럼 받더군요. 자신과의 만남을 거부할 수 없었던 나의 치명적인 아픔과 우울에 대해서는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와 멀어졌습니다. 평생갈줄 알았기에 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지요. 인간관계는 쌓는데는 오랜 시간과 공이 들지만 멀어지는 것은 순간이라는 말이 실감났습니다. 그리고 내가 나를 다독였지요.
'그 친구는 나와 스무살부터 마흔까지 이어진 시절인연이었구나. 더이상 억지로 잡을 수 없구나.' 하고 말이지요. 하지만 몇년이 지난 지금도 그 친구를 생각하면 속상하고 마음이 안 좋습니다. 이렇게 헤어져 버리고 끝낼 수 있는 관계밖에 안되었다는 것이 서글퍼지지요.
떠나야할 때가 언제인가 아는 이의 뒷모습은 아름답다고 하는데요. 우리는 떠날때가 된 것을 알면서도 쉽사리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합니다. 미련이 남아 돌아보고 밍기적거리지요. 흉한 모습을 얼른 떨쳐버리고 새 꽃을 피는데 온 힘을 다 쏟는 일일초 보다도 못합니다. 다 진 꽃을 손에 움켜쥐고 다시 들여다보고 들여다봅니다. 그 꽃이 마치 나의 젊음과 힘을 상징하는 것 같아 다 진 꽃을 놓지를 못하는 거지요.
내겐 아직 필꽃이 남아있습니다. 그 꽃이 몇송이나 남았을지 젊었을때 꽃보다 아름다울지 알 수 없지만요. 언제나 제대로 한송이 피울지 몰라 애가 타지만 기다리고 정성을 쏟으면 이 초라해져버린 나에게도 한송이 꽃을 피워줄 겁니다. 그때를 위해서 지금 내가 갖고 있다고 믿었던 것들을 미련없이 놓을 줄 알아야겠습니다. 다 저버린 꽃을 꼭 손에 쥐고 버티지 않아야겠습니다. 내 다시 피어날 꽃에게 예의가 아니니까요.
나이 든다는 것을,늙어간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초라하고 속도가 느려진 내 모습도 그대로 드러낼줄 아는게 아닐까요. 그 낡아진 몸을 가지고도 어쩌면 생긋생긋 어여쁜 마지막 꽃송이를 피울수도 있다는 희망을 보는 것이요. 행여 꽃을 피우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상태를 가장 건강한 모습으로 까꿀수 있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끝까지 젊은 척 아직 쌩쌩한 척 하지 않구요. 작고 초라해진 내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고 그 자리에서 시작하는것, 그것이 현명하게 나이 들어가는 방법이 아닐까 싶습니다.행여 새 꽃이 피지 못한들 어때요. 이제껏 온 힘을 다해서 피워냈던 꽃의 기억과 향내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가치로운 삶이었잖아요. 그 삶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내가 나를 더 인정하고 다독여주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