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뿌리에서 자라난 꽃입니다.모양도 똑같고 같은 꽃처럼 보입니다.
마치 쌍둥이처럼요. 그런데 점점 자라는 모양을 보니 결코 같은 꽃이 아닙니다.
이거참. 같은 꽃일줄 알고 같이 돌봤는데 결과물은 어쩜 이렇게 다를까요.
이런 머쓱함은 단지 식물을 키울때만 느끼는건 아닙니다.
식물보다도 훨씬 더 당황스럽게 만드는 존재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두아이를 키우는 일입니다.
우리 아이들은 어릴때부터 성향이 정말 달랐습니다.
첫째가 외로울까봐 둘째를 낳았는데 낳고보니 외로움은 둘째가 더 타더라구요.
첫째는 혼자있는걸 좋아하고 조용히 책보는 걸 즐겼습니다. 그런 누나에게 달려들어 놀아달라고 하는 동생을 버거워했지요. 사람 좋아하는 동생은 나름 누나 배려하고 신경쓰고 그렇게나 좋아했는데 그런 누나가 자신에게 관심이 없으니 서운해 했구요.
지나고 보니 꼭 둘이 아니었어도 됐겠다 싶은데요.
아무튼 서로 의지하라고 낳은 둘이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음식점에서 회를 시키면 첫째만 먹고 둘째는 안먹었구요. 우동을 주문하면 둘째만 먹었습니다. 그렇게 음식에서부터 취향 하나하나까지 정말 다르더라구요.
한뿌리 한부모아래에서 태어났는데 어쩜 저리 다를까 싶을 정도로 말이지요.
늘 두 세배의 정성을 쏟아야 두 아이가 케어되었지요.
그런데 큰 아이가 사춘기가 되면서 이 차이는 극명하게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안 그래도 혼자 있기를 좋아하던 딸아이는 이제 방문을 닫기까지 합니다. 자기 공간에 누군가 있는 것을 불편해 하구요. 가족과 함께 뭔가를 하는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없던 말수는 더 줄었구요. 자기가 꽂힌 주제 아니고서는 말을 섞으려 하지 않습니다
나갈때도 들어올때도 말없이 움직여서 어느 날을 집안에 아이가 없는 줄 알았는데 방에 들어갔다가 깜짝 놀란적도 있었지요. 가족 톡방에 의논할 일을 올려도 읽씹하고 답을 안했고 의견을 무르면 늘 모른다. 귀찬다는 대답만 했지요. 잔소리라도 할라치면 자신만의 논리를 내세워서 반박하는데 머리 뚜껑만 열릴 뿐 대꾸하고 싶지 않은 날도 많았지요. 남편과 나는 자주 아이 뒷담화를 했습니다 .이해가지 않는 아이의 행동에 대해서 둘이서 자주 이야기했지요. 어디가서 누구에게 말하겠어요. 불만을 나눌 수 있는 건 둘 뿐이었으니까요.
사춘기를 맞이하지 않은 아들은 6학년인데도 불구하고 딸아이와는 달랐습니다. 다정하게 우리의 기분을 살피고 고맙다,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했어요. 엄마힘들지 않게 하겠다고 스스로 라면을 끓여먹고 짐을 들어주었지요. 아빠가 아프다고 하면 한숨을 짓고 다리를 주물러 주거나 베개를 가져다 주는 것도 모두 아들 몫이었습니다. 주말이면 가족끼리 산책이나 놀러 가기를 바랬고 언제나 누나도 함께 가길 바랬지요. 쌀쌀맞은 누나의 태도에 상처를 받으면서도 이유가 있겠지, 사춘기여서 그렇겠지 이해했습니다. 남편과 내가 누나 흉이라도 하는 걸 들으면 언짢아하며 뒷담화는 안했으면 좋겠다는 의젓한 아들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되니 남편과 나는 아들이 편하고 더 의지할 수 밖에 없더군요. 저 아이도 사춘기가 오면 얼마나 우리를 힘들게 할까 두려우면서도 지금은 따뜻하고 다정한 아들이 마냥 좋았습니다.
"선생님 댁은 큰 아이보다 아들에게 사랑이 편중되어 있는 거 같은데 맞나요?"
평소 편애라고는 몰랐던 나였는데요. 내가 쓴 수필 원고를 보며 대표님이 저렇게 말씀하시더라구요.
"사춘기라서 그럴 거에요. 큰 아이는 사춘기라서 홀로서기 하려고 미운 말과 행동을 하니까요. 아들은 다정하고 우리 기분을 잘 살펴주니 이쁘긴 해요. 자기 이쁨은 자기 하기 나름이라잖아요. 딸아이도 이 이야기 들으면 그 부분은 인정할 거에요."\
편애하지 않는다고 믿었지만 딸아이에게는 "친딸이 아닐지도 몰라."라는 뼈있는 농담이 자주 나왔고 아들에게는 "사랑하는 우리 아들"이라는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모르겠어요. 아들이 사춘기가 되고 딸아이가 고등학생이 되어 조금더 성숙해지면 아마 반대의 일이 일어나게 될지도요. 생각해보면 누가 예쁘고 더 밉고 한 것도 아닌데요. 아들이 했던 말이 떠오르네요.
"우리 집은 편애하는것 같아. "
"그래? 편애 안하는데."
"아니야. 편애해. 나를 더 예뻐해."
어릴 때 그렇게 누나만 예뻐한다고 질투하던 녀석이 이제 자기를 편애한다는걸 보면 조금 더 기운 무게추가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정원의 나팔꽃이 예쁘게 피었습니다. 어느 것은 덩굴을 타고 한없이 올라가구요. 어떤 꽃은 바닥에서 고운 자태를 드러내며 크고 탐스럽게 피었어요. 작지만 색깔이 오묘해서 예쁜 꽃도 있구요. 그늘진 곳에서 시들어가는 꽃도 보입니다. 나팔꽃 모체 입장에서 보면 어느 꽃 하나 예쁘지 않고 귀하지 않은 꽃이 있을까요. 아닐 겁니다. 하나하나 모두 소중하고 귀한 꽃이겠지요.
나 또한 그러고 싶습니다. 아이가 가진 기질이 다 다르지만 그 기질의 아이몫으로 사랑해주고 아껴주고 싶어요. 아이는 아이가 가진 품성대로 멋진 꽃을 피워낼 테구요. 그걸 판단하고 재는 것은 엄마인 나의 몫은 아닐테니까요. 그저 나는 잘 자랄 수 있도록, 자신의 더 잘 드러내 줄수 있도록 튼튼하게 버텨주면 될테지요.
다르고 다른 두 아이를 기르면서 마음이 기울지 않도록 저울추의 영점을 다시 맞춰가려고 해요. 어느 아이도 상처받아서는 안되는 소중한 나의 아이들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