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아에게

커피가 필요한 우리

by 김윤

'아내도 아내가 필요하다'


네가 올린 인스타 봤어. 보자마자 진짜 막 웃었다니까? 오늘 정말 그런 날이었거든. 아내가 필요한 날 말이야. 진지하게 생각해보면 좀 슬픈 말이잖아. 나 편하자고 또 다른 여자가 희생해야 되는 건가 싶어서. 아내가 밥도 해주고 빨래도 해주고 청소도 해주고, 애도 낳고, 어머 그 애도 다 키워주네? 아빠는 애가 커가는 모습을 카톡으로 사진 전송받고 잠깐 흐뭇한 미소 짓는 거, 그거 말고 대체 뭘 하는지 모르겠어.


이런 말 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나 어제부터 열이 났어. 요즘 코로나 때문에 감기도 걸리면 안 된다는데 열나니까 되게 무섭더라. 병원에서 주사도 맞고 약도 타 왔어. H의원, 예전에 우리 고등학교 버스 정류장 뒤에 있는 병원 기억나지? 거기 항상 사람 많은데 오늘 가니까 대기도 없이 바로 진료가 가능했어. 코로나 때문에 병원이 한산하더라. 이 시기에 아프다니 너무 겁나.


오늘은 토요일. 너도 알잖아, 주말만 되면 우리 애 일찍 일어나는 거. 7시에 깬 딸아이랑 겨울왕국 퍼즐을 신나게 맞췄어. 새 밥 먹인다고 쌀도 안치고 미역국도 끓이고 버섯도 볶아서 한 상 차렸지. 참, 밥 안치고 나서 세탁기도 돌렸다. 그 와중에 애는 또 심심하다고 매달려서 급하게 노트북으로 만화 영화를 보여줬어. 최근에 넷플렉스를 결제했는데 아이디랑 비번 치고 들어가서 프로그램 찾는 것도 일이더라. 바쁜 마음에 국자를 한 손에 쥐고 나머지 한 손으로 키보드 쳤어. 아픈 몸을 이끌고 아침부터 이리저리 부산 떨고 있는데, 남편은 어딨었냐고? 출장이라도 갔냐고? 아니, 안방에서 코 골며 자고 있었어.


한 시간쯤 지났으려나. 설거지하고 있는데 안방에 인기척이 들리는 거 보니 남편이 일어난 눈치더라. 근데도 한참을 방문 안에 숨어서 안 나오는 거야. 안 봐도 뻔해. 누워서 핸드폰 게임을 하거나 웹툰 보고 있겠지, 뭐. 그 꼬라지를 상상하니 나도 모르게 천장을 쳐다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어.


평소 같으면 그냥 넘어갔을 텐데 (맞아, 평소에도 종종 그래) 오늘은 몸도 안 좋고 몸도 무겁고. 나도 모르게 혈압이 확 오르면서 방문을 벌컥 열고 쳐들어갔어. 흠칫 놀래더니 꼴에 핸드폰을 몸 뒤로 숨기더라? 그 모습을 보는데 버럭 소리를 안 지르고 배길 수가 있나.


왜 나만! 왜 나만 이래야 돼? 너는 왜 9시가 되도록 누워있냐고! 나는 어디 안 쉬고 싶니? 나도 세월아 네월아 누워서 핸드폰 보면서 안 쉬고 싶어?


한 소리 냅다 퍼부었지. 그랬더니 뭐라는지 알아?


너도 쉬고 싶으면 쉬면 되지, 아침부터 왜 큰소리야?


지도 성질이 났는지 발악 발악을 하더라. 아니, 쉬고 싶어서 다 쉬면 빨래는 누가 하고, 밥은 누가 만들고, 애는 누가 키워? 뇌가 없는 거야 생각이 없는 거야? 그게 아빠가 돼서 할 소리야? 내가 틀린 거야?


집구석에만 처박혀있으니깐 싸우는 거래. 밖에 나가서 바람도 쐬고 해야 되는데 못 나가니깐 싸우는 거라고. 그러면서 갑자기 울산 간절곶을 가자는 거야. 코로나 겁나면 차 안에서만 있으면 된대. 안 내리면 된대. 그냥 답답하니 바람 쐬러 가는 거래. 차 안에만 있는데 바람은 어떻게 쐬는 거야? 나 정말 몰라서 물어보는 거야.


애보기 힘든 거 나도 알아. 놀아주는 거 지치고 답답한 거 나도 알아. 그런데, 최소한의 노력은 좀 해봤으면 좋겠어. 어떻게 하루에 1시간도 애랑 같이 있질 못해? 애랑 대화를 하면서도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를 못 해? 간절곶 가자는 것도 왔다 갔다 시간 때우려고 가는 거 누가 모를 줄 알아? 아이와 함께 할 모든 것을 그저 시간 때우기로만 생각하는 게 너무 서운했어. 내 배 아파서 낳은 그 소중한 아이를 그저 좀 놀아주고 말 그런 존재로 치부하는 거 같아서 정말 속상했어. 우리가 그 아이를 떠맡은 거니?


그래, 그렇게 가고 싶으면 혼자 가라고 했어. 아니, 제발 가달라고 했어. 그랬더니 진짜 갔어. 가뿐하게 홀몸으로,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렇게 떠났어. 이 신혼집에 혼자 들어왔을 때처럼 아주 쉽게, 그렇게 떠났어.


나는 말이야 세탁기에서 빨래 꺼내느라 허리를 숙이고, 아이가 흘린 밥풀이며 감자 쪼가리들을 줍느라 땅바닥을 연신 닦아내고, 응가하면 똥꼬 닦아줘, 물 달라면 물 갖다 줘, 끊임없는 요구를 받아내느라 온몸이 가루가 될 것 같은데, 남편은 아주 손쉽게, 그냥 훌쩍 그렇게 떠난 거야.


허리를 숙이지도 땅바닥을 닦지 않아도 되는 그가,

그저 차키 하나만 들고 훌쩍 떠날 수 있는 남편이,

얼마나 부럽던지.


그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열이 치솟는 느낌이 들었어. 머리가 막 지끈지끈해서 처방받은 약을 복용했는데도, 타이레놀을 또 먹어도 되는지 궁금하더라. 대체 결혼은 왜 해서 이렇게 슬프고 괴로운 건지 잘 모르겠어. 나는 내가 뭘 잘못했는지 도통 잘 모르겠어.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됐을까? 내가 너무 열심히 안 살아서 그런 걸까?


현관문을 쾅 닫고 나가는 아빠를 보더니 아이가 겁을 먹고 막 울었어. 괜찮다고 토닥거리며 안아주는데 타이레놀 대신해 커피라도 마셔야겠다 싶더라. 원두로 된 뭐라도 마셔야겠다 싶어서 냉장고를 뒤적여보니. 글쎄 편의점 커피가 하나 있는 거야. 빨대를 뜯어 꽂으려는 순간, 뚜껑에 조그맣게 쓰여 있는 유통기한이 눈에 들어왔어. 하. 5일이 지났네. 이걸 마셔, 말어? 남편이랑 싸울 때도 흐르지 않았던 눈물이 막 터져 나왔어. 너무 서러웠어. 커피를 못 마신다는 거잖아.


눈물을 닦고 정신을 좀 차렸어.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남편이 쓴 롯데카드 결제 문자가 두 통이 와있는 거야. 맥도널드에서 8900원, 커피숍에서 4,500원. 그 와중에 배가 고파? 먹을 게 막 생각나? 그걸 보니까 막 나도 나가서 돈을 쓰고 싶더라? 애 보기 싫어서 주말에 가출한 남편도 돈을 쓰는데 나라고 못 써?


그 길로 동네 커피점에 가서 제일 비싼 커피를 시켰어. 5,000원밖에 안 하더라? 그래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도 한 잔 더 시켰어. 나중에 남편이 집에 오면 또 머리가 아플 것 같아서 그때 또 커피가 필요할지도 모르니. 괜찮은 판단이었지? 종이 캐리어에 커피 두 잔을 쏙 넣는데, 묘하게 기분이 괜찮았어.


쓸데없이 돈을 쓴다는 걸 알면서도 화를 풀려면 돈이라도 써야겠다 싶더라. 그 와중에도 아, 사람이 화를 내면 돈을 쓰는구나 평소에 화를 잘 안 내고 유순한 성격인 사람은 돈을 허투루 쓰는 법이 없겠다는 생각까지 했어. 나 정말 웃기지 않아?



오후에는 종이컵 천 개 쌓기 놀이를 하고 놀았어. 진짜 천 개는 아니고 애가 원하는 모양이 나올 때까지 그냥 생각 없이 쌓는 거야. 한 번 쌓고 다른 모양으로 하고 싶다고 해서 그걸 무너뜨리는데 와르르 소리가 났어. 내가 허리를 숙여가며 집안일하고 땅바닥을 기어 다니며 밥알을 주워서 유지시킨 결혼생활이 한방에 무너지듯 말이야. 너도 나중에 진짜 한 번 해봐. 정말 와르르 소리가 나.


애가 참 좋아하더라. 그 무너지는 꼴을 보려고 다시 쌓자고 할 정도로. 근데 있잖아, 실은 나도 좋았어. 정말 뭔가 와장창창 와라라라락 엎어지는 것 같았거든. 뭔지 몰라도 속이 뻥 뚫릴 만큼 시원했어. 기분 완전 짜릿하더라.


몇 번을 무너뜨리고 다시 쌓아 올렸어. 문득 내 결혼생활은 이렇게 다시 쌓을 수 있는 걸까 싶더라. 아니, 어찌어찌 살기는 살겠지. 내가 뭐 이혼이라도 할 순 없잖아. 살긴 사는데 어떻게 살 수 있을지를 모르겠어. 방법을 모르니 다시 쌓아도 툭 건들면 쉽게 무너지는 종이컵처럼 살게 되진 않을까 겁이 나. 그때마다 아이 아빠는 바람을 쐬러 홀러 드라이브를 떠나겠지. 나는 다시 열이 나고 아이를 부둥켜안고 울게 될 거야.


그 두통, 그 열감, 눈물, 괴로움.

은아야, 나는 다시 감당할 수 있을까?

오늘 같은 날이 다시 반복된다면

난 정말 다 포기하고 싶어 질 것 같아.

여자의 인생은 정말 지랄 맞아. 완전 개떡 같아.


나도 참, 너한테 별소리를 다하고 이제 진짜 아줌마 되었나 보다.

다 쏟아내니 기분은 한결 낫긴 한데, 너한테 이런 말 듣게 해서 너무 미안하기도 하네. 오늘만 좀 봐줘라.


그나저나 너는 오늘 뭐하고 지냈어?

너에게도 커피가 간절한 시간이 있었니?

우리의 내일은 좀 낫겠지?

그러기를 바라는 오늘이야. 그렇게 믿자.


우리의 눈물이 곧 마르기를

우리의 탄식이 어제보다 더 짧기를, 그러길 바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