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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 Dec 23. 2019

우리의 공간

TV를 없애고 책장을 놓다




집을 말끔하게 정리했다. 발을 딛는 공간만 치우며 살았는데, 이대로 가다간 가슴이 턱 막힐 것 같았다. 제일 먼저 한 일은 TV 없애기였다. 나름의 치열한 고민과 생각, 남편과의 의논 끝에 TV를 떼어냈다. 기부를 하진 못하고 뾱뾱이로 둘둘 감아 창고에 두었다. (꽉 찬 창고에 공간을 확보하는 것도 힘들었다.) TV가 있던 곳에 새하얀 책장을 들였고 작년부터 한 권 두권 사다 놓은 책들을 촤르르 꽂았다. 설렜다. 수십수백 번 머릿속으로 상상하던 그림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책을 꽂으며, 그래 이 책도 있었지, 저 책 옆에 두어야 더 빛을 바랄 거야 혼자 중얼거리며 어울려 보이는 책들끼리, 작가끼리 한데 모았다. 나만의 책장을 완성시킨 후, 몇 날 며칠은 그 앞을 괜히 어슬렁거리거나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그곳에 TV가 있었다는 사실은 곧장 까먹었다. 눈 앞에 보이지 않으니, 드라마도 예능도 영화도 마음속에서 사라졌다. 순식간에 비워졌다.



 한눈에 정리가 되니 욕심을 놓게 되었다. 딱 이 책장만큼만 채우고 살자는 생각이 들었고(지나친 욕심부리지 않기), 소장하고픈 책과 다시 읽지 않을 것 같은 책이 삽시간에 분류되었다. 다시 읽지 않을 것 같은 책 중에 새 책처럼 깨끗한 책은 지인에게 선물했다. 나머지 책들은 도서관에 기부할 예정이다. 집에 책이 얼마나 있는지도 모르고 매달 1일이 되면 소비욕을 채우고자 책 두세 권씩을 사서 여기저기 쌓아두었는데, 당분간은 책을 사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 한 번 정리를 하고 나니, 뒤따르는 것 또한 자연스럽게 정리가 되는 경험을 했다.  



 아이는 TV가 어디 갔느냐고 묻지 않았다. TV로 인해 재밌었던 경험은 크게 없었던 모양이다. 그건 다행이었다. 혹여나 아이가 없어진 TV를 찾아서 묻고 또 물을까 봐 그게 가장 걱정이었기 때문이다. 대신 아이는 아빠와의 시간을 조금씩 즐기고 있다. 스스로 책을 꺼내 읽는다던지, 스스로 놀잇감을 찾는다던지 그런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우리의 공간을 아끼는 마음, 가족의 시간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생각해보는 힘, 함께 놀이하고 같이 정리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조금 배운다면 좋겠다.



 남편에게 처음 TV를 없애자고 했을 때 그는 1초도 고민해보지 않고 '그래'라고 대답했다. 사람이 와서 벽에서 TV를 '제거'해주기로 했다고 하니 그제야 살짝 아쉬워하는 것 같아 보이긴 했다. 고요해진 첫날밤. 캄캄한 거실의 소파에 나란히 앉아 1시간이 넘도록 대화를 나누었다. 원래도 말 많은 부부 사이긴 하지만 평소보다 길고 긴 시간을 가졌다. 왠지 느낌이 좋았다. 우리는 아이를 재워두고 밖으로 나와 의미 없이 채널을 올리고 내리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흘러나오는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각자 스마트폰에 정신 팔지 않게 된 점이 만족 만족 대만족이다. TV 소리가 없어지니 서로에게 혹은 각자에게 더욱더 충실한다. 쓸데없이 연예인의 삶을 들여다보지 않게 된 것도 좋은 점 중에 하나이다.



사방이 고요하다. 아침의 소리, 밤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한 번이라도 더 마주할 시간이 만들어졌고, 어느 주말 새벽에는 훨훨 날아가는 새의 날갯짓에 눈길을 둘 수 있어 황홀했다. 따뜻한 차 한잔을 끓이는 것에 시간을 더 쓰고,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거나, 함께 들을 음악 선곡하는 데 쓰는 시간이 좋다. 영화나 예능을 아주 신중하게 선정한다. 정말로 꼭 보고 싶은 것만 추려내어 시청한다. 많은 선택지 중에 어쩔 수 없이 하나를 택하는 수동적일 수밖에 없었던 내가, 이제는 원하는 것을 제대로 즐기는 능동적인 삶을 살게 된 것 같은 뿌듯함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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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내가 꾸린 공간에 들어서면 가슴이 탁 트인다. 이리 둘러보고 저리 둘러봐도 기분이 좋다.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깊이 고민했고 실천했으며 행동한 그 결과물이다.

앞으로의 시간도 이렇게 쓰면 된다. 한 번 해봤으니, 잘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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