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알고 있는 세계적인 복사기 회사 후지 제록스. 그 전신이 된 복사기를 만든 체스터 칼슨에게 누군가 보낸 편지였다. 요즘에야 복사기 없는 사무실을 상상할 수 없지만 불과 70여 년 전만 해도 사정은 완전히 달랐다. 일단 발명은 했지만 20여 개 넘는 회사에 상품화를 요청한 그의 제의는 숱한 거절을 당해야만 했다. 밤하늘의 혜성처럼 등장하자마자 슈퍼스타가 됐을 것만 같은 이 복사기가 말이다.
복사기를 발명한 체스터 칼슨
"이 전화라고 불리는 것은 너무 단점이 많아서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사용되기에는 무리가 있다"
1876년 미국 통신회사 웨스턴 유니언이 노벨이 발명한 전화를 두고 남긴 메모다.
오늘 나는 배달앱을 사용해 피자를 고르고 삼성페이로 결제해 피자를 배달시켜 먹었다. 지문 인식 하나로 결제는 3초에 끝냈다. 월급 봉투에 빳빳하게 들어있는 현금을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건네는 장면 같은 건 드라마 속 이야기다. 물건을 사면 신용카드로 결제하거나 삼성페이, 롯데페이, 카카오페이를 사용한 지문 인 식 한 번으로 돈을 송금한다. 투자도 저축도 온라인에서 앱을 통해 한다. 금융의 혁신은 복사기, 전화기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방향을 바꾸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물건을 살 때도 삼성 페이를 쓰거나, 온라인 결제를 사용한다. 소비와 저축, 투자의 방식을 바꾸는 게 금융과 기술이 결합된 핀테크(financial technology)다.
100년 전, 50년 전 복사기와 전화기가 그랬듯 시험대에 오른 건 단연 핀테크.
솔로우(Solow)의 "생산성 역설"(productivityparadox). 지난 수 십년 간 미국은 정보기술에 막대한 엄청난 투자를 했다. 투자에도 불구하고 이전보다 생산성 증가율은 크게 둔화됐다. 솔로우의 생산성 역설도 비껴가는 게 핀테크다.
지난 5년 사이 벤쳐 캐피탈과 인수 합병을 통해 핀테크로 흘러들어간 금액은 10배가 늘었다. 작년 한 해 만 1118억달러다.
핀테크는 은행들의 적에 불과한가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 총재 마크 카니는 "핀테크의 잠재력은 은행 기능을 세분화하는 것에 있다"라고 했다. 결제부터 자본 배분까지 모든 걸 손에 꼭 쥐고 있던 은행의 입지가 줄어들 수 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중앙은행장들, 규제 당국, 은행들에게는 핀테크의 성장이 오히려 '파괴적 기술'일 수 있다. 이 파괴적 기술을 받아들인 결과는 어떨까.
아프리카 케냐, 탄자니아에는 M-Pesa라는 게 있다. 대부분의 우리에게는 생소할 수 있지만 아는 사람들은 아는 핀테크 성공 스토리의 주인공이다. 현지 이동통신사 사파리콤이 제공하는 서비스다. 페사는 '돈'이란 뜻이다. 케냐 인구 75%가 가입했다. 스마트폰을 활용한 결제. 이전에 은행을 이용할 수 없던 사람들에게 손 안의 은행을 열어줬다. 케냐 정부가 이를 막았다면 절대 가능하지 못했을 이야기다. 은행들의 은행이라 불리는 국제결제은행(Bank for International Settlements)의 연구결과와도 일치한다. 규제가 적고 은행 시스템이 발전하지 않은 나라들에서 핀테크가 발전했다는 것. M-Pesa는 케냐의 총 생산성 14%에 기여했다. 경제 성장률 자체를 끌어올려준 공신이었던 것이다.
금융 기관을 이용할 수 없었던 사람들의 저축률이 올라가면서 펀드들의 관심도 높아졌다. 스타트업 생태계도 활발해졌다. 자본이 몰린다는 건 경제 성장의 핵심 요소다. 케냐 외에서도 이것이 가능하다면, 전세계에 아직도 은행 계좌를 갖지 못하고 있는 17억 명의 사람들에게, 산업에, 인프라에, 인적 자본에 기회가 될 것이다.
물론 핀테크가 답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저평가를 받았던 여러 신기술과 발명들처럼 핀테크는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혁신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혁신은 저성장의 시대에 전세계적 성장 붐을 가져올 수 있다. 기회는 위기 속에서 온다. 저성장의 늪에서 우리 정부가 눈을 감고 입을 닫는 사이, 지금도 전세계에는 핀테크 잠룡들이 꿈틀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