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일을 하며 책을 썼던 분들, 자기계발에 철저한 분들의 이야기엔 자주 겹치는 행위가 있다. 새벽 시간을 이용해 글을 쓴다는 것이다.
각자의 이유가 있지만, 그럼에도 겹치는 게 있다. 우선 정신이 맑다. 그분들의 새벽을, 알람 소리에 억지로 일어나 당장 출근하기 정신없는 일반인의 새벽과 비교해선 안된다. 해가 뜨기 전, 여유 있게 일어나 차 한 잔과 시작되는 고요한 새벽을 말한다.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일어난 상태의 새벽을 말한다. 확실히 그런 새벽은 정신이 맑다. 피로가 쌓인 저녁과 다르다.
또 하나. 현실적으로 새벽만이 온전히 자신이 컨트롤하고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다. 일을 할 경우 저녁 시간을 일정하게 확보하지 못할 때가 많다. 변수가 많다. 없던 출장과 야근이 생길 수도, 예상치 못한 회식이 잡힐 수도 있다. 업무가 늦어질 수도 있고. 게다가 글쓰기를 위협하는 매력적인 유혹으로 넘쳐난다. 글에 집중하기 위한 고정된 시간을 확보하기엔 새벽만 한 때가 없다.
그럼에도 난 새벽보단 저녁에 글을 많이 쓴다. 아니, 어쩌면 용도가 다를지도 모른다. 새벽이 맑은 정신으로 창의적인 생각을 하기에 좋다면, 저녁은 뜨거운 열정으로 글을 내뱉기 좋다. 그건 하루 일상에서 나를 글 쓰게 만드는 소재, 동기, 자극을 만나기 때문이다. 일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사물과 현상을 관찰하고, 내 마음을 돌아보는 과정에서 수많은 자극을 받는다. '이런 글을 써볼까'란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이런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떠오르기도 한다. 속에서 끓어오름이 느껴진다. 열정을 가지라는 메시지 때문이 아니라 자연스레 글쓰기에 대한 열정이 생긴다. 그 열정은 내 몸을 자극해 손으로 휘갈기든 키보드를 두드리든 뭔가를 쓰라고 압박한다. 내면의 끓어오름이 지속돼 조금씩 넘쳐나려 한다.
그 '때'가 중요하다. 그런 끓어오름이 있을 땐 글을 배설說 해야 한다. 글을 쓰라는 자극을 온몸으로 느꼈을 때, 자리에 앉자마자 바로 휘갈기고 싶은 무언가가 있을 때 바로 글을 써야 한다. 문장을 가다듬는 건 다시 해도 괜찮다. 좋은 글일지 나쁜 글일지 판단하는 것도 일단 뒤로 미루자. 간단히 구조만 세운 뒤 그때 바로 끄적여야 한다. 제일 글이 잘 써질 때다. 수 천자의 글도 막힘없이 써질 때다. 게다가 그 안엔 날 것 그대로의 감정과 생생한 이야기가 담긴다. 때를 놓치면 안 된다. 며칠 뒤 맑은 정신의 새벽을 맞이한들 끓어올랐던 그 순간에서 얻을 수 있는 맛을 내기 어렵다. 제철 과일이, 갓 잡아 올린 생선이 맛있는 것처럼 글도 그 싱싱한 마음이 있을 때 써야 한다. 숙성? 숙성도 일단 싱싱할 때 수확한 재료를 숙성해야 맛있다. 글도 싱싱할 때 쓴 글을 퇴고해야 맛있다.
삶을 복기해보면 이는 비단 글쓰기만의 얘기가 아니다. 성취, 성공과도 연결된다. 살다 보면 한 번씩 '이건 꼭 하고 싶다'란 열정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가 있다. 잠깐 스쳐가는 충동과는 다르다. 내면에서부터 올라온 욕망이다. 타인의 시선, 사회적 요구와 상관없다. 이걸 해서 성공할지 실패하지도 중요하지 않다. 그냥 하고 싶고 해내고 싶은 무언가가 떠오른다. 감정은 끓어오르고 이성적으로 판단해도 자명하다. 그럼 그때 해야 한다. 그때만큼 강렬한 추진력과 힘이 생길 때가 없다. 스스로 몰입하게 되고 거침없이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안타깝게도 우린 그 '때'를 놓친다. '이걸 해도 될까'란 의구심, '해서 안되면 어떡하지'란 두려움, '이걸 해서 뭐 해'란 자기합리화, '내가 할 수 있을까'란 걱정으로 행동을 미룬다. 스스로 열정을 사그라지게 만든다. 열정이란 선물을 스스로 거부한다. 그러면서 다른 곳에서 열정을 쥐어짜낼 수 있길 기대한다. 이렇게 미뤄둔 열정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내면 깊은 곳에 남아 있다. 대신 형태를 바꾼다. 하나의 과제로, 하나의 응어리로, 하나의 후회로. 그렇게 미루고 미뤄놨던 열정을 훗날 다시 꺼내는 사람이 있고 평생 한으로 남겨두는 사람이 있다. 뒤늦게라도 하면 다행이다. 사라진 불씨를 다시 지필 수 있다. 하지만 그만큼 또 다른 노력이 필요하다. 당연히 비효율적이다.
뜨거운 열정은 이성적 판단과 계획된 의지만으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행위를 유발하는 강력한 동기가 있을 때 그 행위를 하는 게 좋다. 그 안엔 미숙함이 있을지 몰라도 생생함이 있다. 단순히 머리로 짜내서 만들어낼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무언가가 끓어오른다는 것. 예술가들은 말하는 영감, 과학자나 발명가들은 표현하는 직관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위대한 사람들은 그때를 놓치지 않는다. 아르키메데스는 목욕을 하다 밀도를 측정하는 방법을 발견했다. 흥분한 나머지 '유레카(알아냈다)!'를 외치며 알몸인 채로 달려갔다는 건 워낙 유명한 일화다. 그때 아르키메데스가 '좋은 아이디어인데 일단 탕에서 몸을 불리고 사우나에서 땀을 뺀 뒤 미온수로 몸을 깨끗이 씻고 보습제로 온몸에 수분을 보충한 뒤 몸무게의 변화를 측정해보고 바나나맛 우유를 하나 마시며 자연바람으로 몸을 말리고 기분 좋게 집에 가서 한숨 잔 다음에 연구실에 가서 이 위대한 발견을 검증해보자'라고 했으면 어땠을까.
끓어오름이 있을 땐 글을 배설해야 한다. 지나고 나서 그 감정과 느낌과 열정을 되찾긴 힘들다. 다 때가 있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