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우리가 자신의 동향을 인식하고 있음을 그 존재 역시 인식한 것일까. 풀 숲을 헤치고 흙을 밟는 소리가 사라졌다. 지금의 적막은 더 이상 평소의 적막이 될 수 없었다.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았기에 오히려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우게 되는 그런 적막.
하지만 그 적막은 오래가지 않았다. 탄약고를 둘러싸고 있는 산 전체가 스피커라도 된 것일까. 아니면 노래방에서 느끼는 에코 현상 같은 걸까. 알 수 없는 괴음이 서라운드 사운드로 들렸다.
"꾸우우이이익"
"꾸에웩"
"후엑. 후웩"
미친 성량과 거친 숨소리, 공간을 울리면서도 날카롭게 째지는 음파. 잠시 후 그 소리의 주인공이 탄약고 주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멧돼지다. 성체 멧돼지와 새끼 멧돼지 4마리.
그 포스는 "밥 달라고 꿀꿀꿀~♪"의 그 돼지가 아니다. 일단 울음소리부터 정직하고 귀여운 "꿀꿀"이 아니지 않나. 사람은 새로운 환경에 노출되고 자극을 받으면 과거 학습된 기억 속에서 가장 유사한 범주와 패턴을 찾는다. 빠른 대처와 효율적인 학습을 위해 자동반사적으로 그렇게 된다. 그때 나에게 떠오른 건 믿기 어렵겠지만 SF 영화 속 오크다. 돼지 같은 얼굴에 어금니가 튀어나와 있고 강한 전투력을 가진 가상의 종족. 실제로 만나 뵌 적은 없지만 그 느낌이다.
이 흑갈색의 멧돼지 5마리는 무엇을 하고 싶었던 걸까. 탄약고를 향해 내려오더니 잠시 주위를 살폈다.
양손으로 소총을 단단히 잡았다. 다행히 초소에는 문이 있다. 위로는 모두 뚫려 있지만 멧돼지가 움직이는 아래쪽은 초소가 몇 번의 몸통 박치기는 막아줄 수 있다. 만약 멧돼지가 우릴 향해 달려오면 어찌해야 할까. 아무리 군대라지만 함부로 총을 쏠 수는 없다. 그럼 개머리판으로 내려 찍어야 하나, 총검술로 멧돼지와 백병전을 치러야 하나.
머릿속에서 온갖 시나리오가 그려졌다. 하지만 선임과 나는 알고 있었다. 타노스를 상대로 승리할 시나리오를 찾는 닥터 스트레인지의 상황을 조금은 이해한다. 멧돼지를 상대할 14,000,605개의 모든 경우의 수를 그리더라도 지금 가장 먼저 해야 할 단 1개의 행동은 확실했다.
"보고"
군대는 보고만 잘해도 기본은 먹고 간다.
어릴 적 전략 게임을 하도 했어서 그런 건지, 나는 멧돼지 5마리는 물론 여기에 정신 팔리느라 다른 걸 놓치지 않도록(멧돼지로 시선을 분산시키고 침입하는 전략까지 상상하는 나) 그 주위 상황까지 최대한 폭넓게 관찰했다. 그 사이 선임은 현재 상황을 차분히 보고했다. 여긴 에버랜드 사파리나 체험 농장이 아니다. 혹시 근무 교대나 순찰을 위해 찾아오는 사람이 이동 중에 멧돼지를 만나기라도 하면 상당히 위험하다.
긴장감이 이어지는 대치 속에서, 멧돼지 가족은 당연히 먹을거리가 없을 탄약고에 흥미를 잃었는지 반대 방향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그리고 이후 다시는 그 가족을 볼 수 없었다. 물론 고라니 외 기타 동물 친구들은 종종 만났지만.
군 생활을 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상급 부대의 높은 사람도 봤지만, 역시 순간 존재감이 가장 쩔었던 건 역시 그때의 멧돼지다. 2등은... 음... 교육 중 만난 풍채 훌륭하신 짬타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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