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인식
수단으로 소모되는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방향이 필요하다. 타인이 내 무의식에 주입한 방향이 아니라 순수하게 나라는 사람에게 맞는 방향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한 곳을 보고 뛰는 사회에 익숙해져 있다. 틀렸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오랫동안 그게 맞는 방법이었다. 가난을 탈출한 누군가를 목표로 찍고 모두가 한 점을 향해 뛰어야 했다. 하지만 세상은 달라졌다. 이제는 다들 알고 있다. 한 점을 보고 뛰어야 하는 인생은 타인의 삶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제는 모두가 다른 방향, 각자의 방향으로 뛰어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
방향설정에는 필연적으로 좌표가 필요하다. 출발점과 도착점이 있어야 남쪽으로 가야 할지 동쪽으로 가야 할지 정할 수 있다. 물론 이건 물리적인 세계와는 다른 문제다 보니 GPS좌표처럼 떨어지는 지점을 만들어낼 순 없다. 하지만 좌표가 구체적이면 구체적일수록 이뤄지기도 쉽다. 이건 마치 허공에 떠다니는 ‘생각’을 소재로 ‘형상’을 빚어내고 그 형상이 ‘현실’로 바뀌어 내 일상이 되는 과정이다.
삶의 방향을 정하기는 쉽지 않다. 어쩌면 이건 철학적인 문제일 수 있다. 아마 평생 삶의 방향 없이 살다 가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세상에는 방황하는 사람들을 위한 조언이 참 많다. “목표를 확실히 정하고 나아가라!”, “아직 덜 간절해서 그렇다. 더 절박해져라!” 이런 이야기들을 듣고 있자면 오히려 내가 더 초라하게 느껴진다. ‘다들 저렇게 쉽게 하는데 나는 왜 못할까..’ 그런데 그렇게 쉽게 답이 나온다면 다들 왜 고민을 하고 있겠는가. 훌륭한 사람들도 못난 과거와 시행착오의 과정이 있었을 텐데 왜 성공한 현재에만 집중하는지 모르겠다. 물론 결과중심적으로 사는 건 중요하고 또 필요하다. 하지만 순서는 분명히 잘못됐다. 결과에만 집중하다 보면 지금 한 발을 내딛기 힘들다. 막막하게 느껴진다. 대신 목표보다 출발점인 현재에 집중해 보면 생각보다 당장 할 수 있는 게 많다는 걸 알게 된다.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다.
현재 나의 위치를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자아인식이 필수다. 자아인식은 나에 대해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행위이다. 쉽게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일을 계획하고 준비하는 과정을 보자. 가볍게는 창밖에 비가 오고 있다면 비가 오는 길거리에 서있는 나를 상상하면서 우산을 가져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좀 복잡하게는 명절연휴에 고속도로에서 하루를 보내는 자신을 상상하면서 다음날 새벽으로 일정을 바꾼다. 우리는 그 상상의 과정에서 비에 맞아 축축한 촉감을 느껴보기도 하고, 끝없이 줄 서있는 고속도로에서 지루함을 느껴보기도 한다. 모두 자아라는 가상의 인물을 상상 속 환경에 대입해서 시뮬레이션을 돌려보고 그 안에서 느끼는 감정에 따라 현재로 돌아와 미래를 준비한다. 자아를 우리가 평소에 사용하는 과정이다. 무언가를 계획하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자아는 이렇게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 시뮬레이션이 얼마나 현실성 있는가, 대입된 자아가 얼마나 실제와 가까운가’는 계획의 성공이냐 실패냐를 좌우하게 된다.
한때는 내가 건강한 신체를 가졌고 땀 흘리고 몸을 쓰는 일이 맞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 일을 하고 몇 년 지나지 않아 내 몸이 얼마나 내구성 떨어지는지 알았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비교해 보니 그건 심각한 착각이었다. 선천적으로 약한 신체부위가 있다는 것도 그제야 알게 되었다. 또한 군대식 문화가 얼마나 안 맞는지 누군가를 찍어 누르는 지시가 필요한 상황에도 나는 항상 의문을 가지며 일을 그르쳤다. 그냥 스스로를 강인하고 단호하다고 믿고 싶었던 것일 뿐 실제의 나와는 큰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스스로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흔히 알고 있는 자신은 실제 그 사람이기보다는 그렇다고 ‘믿고 싶은’ 사람인 경우가 많다. 우리를 겹겹이 방어하고 있는 심리장치들은 그대로의 자아를 인식하기 어렵게 만들어놨다. 마치 녹음된 내 목소리를 듣고 어색하게 느끼는 것처럼 ‘나’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왜곡이 생긴다. 그러다 보니 앞에서 말한 미래를 계획하는 과정에서 실제의 나와 다른 내 아바타가 시뮬레이션에 오류를 일으킨다. 나한테 잘 맞을 것 같던 일이 막상 해보니 전혀 다른 경우가 생기고,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호기롭게 덤벼들었는데 높은 벽을 실감할 때가 있다. 모두 실제와 다른 자아가 일으킨 오류들이다. 이렇게 허상에 가까운 자아를 가지고 있으면 원하는 결과를 얻기 어렵다.
실제와 가깝게 나를 인식하는 일은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 특히나 결과지향적이고 개인보다는 전체를 우선시하는 문화에서는 더욱이 스스로 객관적으로 보는 눈을 갖기 어렵다. 다른 사람보다 나에 온전히 집중해서 천천히 살펴야 하는데 정신없이 결과를 요구하고 집단에 개인을 맞추길 강요하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나라는 사람이 어떤 상황에서 무슨 감정이 드는지, 뭘 좋아하고 언제 행복한지, 불행한지 이런 것들을 찾는 연습을 했어야 하는데 우리는 보통 그러지 못했다. 성인이 되어 뒤늦게 방향을 잃는 이유는 이렇게 출발의 기준점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아인식은 어떤 삶이 나에게 맞는지, 나한테 어떤 능력과 잠재력이 있는지 발견하는 기준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명확해지면 그 잣대로 세상을 판단하며 선택의 옳고 그름을 말할 수 있게 된다. 타인에게 휩쓸리는 일도 줄어들고 불안했던 마음도 어느 정도 가라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