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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umiLuna Jun 09. 2020

민들레의 역습

노란 괴물들

"어느새 내 마음 민들레 홀씨 되어  강바람 타고 훨훨 네 곁으로 간다~" 


민들레는 이 곳에 와서 살기 전 한국에서는, 물론 도시에서 살았던 탓도 있겠지만, 오래전 노래에서 나온 "들길에 홀로 핀" 소녀적 느낌의 꽃, 그리고 가끔 외곽에 있는 완벽한 구 모양의 하얀 씨앗들을 후후 불어 날리는 재밌고 신기한 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핀란드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에스포(Espoo)는 확실히 헬싱키 도심처럼 시내 중심가 느낌은 아니지만 명색이 한국의 경기도와 같은 최대 위성도시인데 산책길에 만나는 엄청난 규모의 공터? (실상 아무 작물도 키우지 않는 잡초 무성한 땅들. 한국인의 눈에는 왜 이런 땅을 놀리고 있나 싶은 잉여의 공간들 말이다)나 노루/사슴, 토끼, 다람쥐와 같은 동물 친구들에 가끔 "나는 누구, 여긴 어디"의 초현실적 상황에 놓이기도 한다. 

 

5월 중순 산책을 나갔다가 어느샌가 온 들판을 덮어 버린 민들레들을 보고 엄청 신기해서 찍어 놓은 사진들이다. 이곳을 둘러봐도, 저곳을 둘러봐도 온통 노란색 꽃들이다. 이제 이 꽃들이 지고 나면 하얗게 민들레 씨앗들이 달릴 걸 생각하니 아찔했다 (물론 들판을 달리면서 발끝에 부딪혀 날리는 꽃씨들을 보는 건 재밌을 것 같기도 하지만). 그냥 보면 들꽃처럼 아름답기도 하지만, 이렇게 사방이 노란색으로 덮여 있는 걸 보니 멀리 저 높은 곳에서 보면 노란색으로 점점 물들어 가는 모습이 왠지 노란 괴물이 땅을 침범하는 모습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마당에 퍼진 이 민들레들은 또 얼마나 골치가 아픈지, 소녀소녀 한 꽃 모양이나 홀씨들의 감성과는 다르게 깊이 박혀있는 뿌리가 웬만해서는 뽑히지 않는다. 집집마다 봄엔 민들레와의 전쟁이지만 바람에 흩날리는 홀씨들 때문에 한 집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 뿌리 뽑을 수 없다.   

이 강인한 생명력에 몇 개 뽑다가 이내 생각을 바꿔 버린다. 우린 결코 이 전쟁을 이길 수 없을 거라고 ㅋㅋ. 처음엔 잡초와 들꽃, 야생화의 차이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아주 긍정적으로 예쁜 눈으로 봤다가, 요런 잡다한 침입자들 덕분에 우리가 뿌려 놓은 잔디들이 맥없이 땅을 뺏기고 있는 것들을 보면서 미운 마음에 뽑기도 했다가, 결국엔 또 타협하게 된다. 


가끔 지나가다가 잔디가 파릇파릇 발 디딜 틈 없이 꽉 차 있는 마당을 보면 예전엔 없던 존경스러운 마음이 든다. 얼마나 끊임없는 전쟁을 해 왔을지 감히 상상이 가기 때문이다. 

6월에 다시 찾은 이 공터에는 온통 하얀 동글이들이 가득하다. 그리고 이 동글이들도 서서히 다른 꽃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있다. 


핀란드는 우리나라처럼 산이 없지만 엄청나게 많은 호수와 숲들이 있다. 영화 '카모메 식당'에서 핀란드 청년이 말한 것처럼 이런 자연환경 특히 숲은 핀란드인에게는 치유의 장소이자 에너지를 주는 곳인 것 같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되니 (아 내 기준의 여름은 이곳엔 절대 오지 않을 것 같긴 하지만) 인스타에 있는 핀란드 친구들은 매일매일 숲, 꽃, 곤충들, 오리, 바다 등 자연의 모습들을 찍어 올리기에 정신없다. 길고 캄캄한 겨울이 지나 생명들이 여전히 건재함을 느끼게 해 주는 이 자연의 변화를 보면서 이제 캄캄해지지 않는 여름이 오는 것을 온몸으로 기뻐하고 있는 것 같다. 

나 역시 암막 커튼 없이는 잠이 들기 힘든 요즘 같이 밝은 날에도 햇빛의 소중함을 새삼스럽게 느끼며 매일매일 숲에 가서 좋은 기를 많이 받고 오려고 노력 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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