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에 특별히 구애받지 않는 생활
핀란드에 와서 살기 전까지는 날씨가 인간의 기분과 생활에 이렇게 많은 영향을 끼치는 것인지 미처 몰랐다. 눈이나 비가 오면 좀 귀찮은 거 외에는, 더 이상 뚜렷한 지는 몰라도 사계절이 있고, 저녁이 되면 캄캄해지고 또 아침이 오면 환해지고... 몸도 마음도 너무 익숙해져 있는 날씨와 계절의 변화였기에 딱히 신경을 안 쓰고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 곳으로 이사 온 건 9월 초, 아직까지는 한국의 가을 날씨와 비슷하게 청량한 바람, 울긋불긋 서서히 물들기 시작하는 나무들, 파란 하늘 너무도 완벽한 날씨와 계절이었다. 하지만 만나는 사람마다 곧 다가올 늦가을과 겨울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봄에 왔으면 좋았을 걸이라는 말을 하는 걸 들으며 순간 GOT의 "Winter is coming"을 떠올리며 아니 도대체 어떠하길래 궁금해하기도 했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
가을에는 종종 비가 많이 왔던 거 같다. 날씨도 점점 추워지기 시작하고 비가 내리는 어느 날 아침, 아이들을 챙겨 차에 태우고 라이드를 가면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보니 신기하게도 우산을 쓰는 사람이 참 없다. 비가 꽤 오는데도 아이들은 그저 평소와 다름없이 자전거를 타고 다니고, 어른들 역시 이런 비쯤이야 개의치 않는 듯 겉옷에 달려있는 후드를 쓰고 있거나 그마저도 안 쓰고 잘만 다닌다. 핀란드에서 우산 장사는 망하겠다 생각하며 지나쳤는데 그 이후에도 비가 올 때마다 목격했던 장면은 크게 다르지 않다. 심지어 엄마랑 아이랑 같이 걷는데, 엄마 혼자 우산을 쓰고 아이는 그냥 비 맞고 있는 경우도 보고, 여전히 우산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남편은 가끔 나에게도 "You are not made of sugar"라는 말을 하는데, 비는 그냥 물일 뿐이다 라는 생각이 강한 것 같다. 아마도 산성비, 방사능 비, 무시무시한 오염된 비가 아직 없어 봐서 그런가 보다 한다.
(사진은 구글에서 캡처한 것입니다. )
막내 아이 어린이집에는 벽에 위와 같은 옷 가이드가 붙어 있는데, 이런 가이드가 있다는 게 재밌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유럽의 모범생답게 계절마다 보내야 하는 옷들이 정해져 있는데, 기본적으로 비가 와도 바깥에서 입고 놀 수 있는 비 옷 (멜빵 달린 비 옷 바지, 후드 달린 비 옷 잠바)과 방수 장갑, 비 장화가 있어야 하고, 살짝 춥고 눈비가 올 수 있는 가을에 입는 한 벌 짜리 방한복 (요 때 비가 온다면 방한복 위에 비옷 세트를 입힌다.), 그리고 많이 추울 때 입는 한겨울 용 한 벌 짜리 방한복들이 그런 거다. 장갑도 비 장갑, 가을 장갑, 겨울장갑 용도별로 다 있다. Haalari 라 부르는 이 한 벌 짜리 방한복은 기본 방수 재질이라 비에서, 눈에서 뒹굴뒹굴해도 몇 시간은 거뜬하게 버틸 수 있다. 부러워서 어른 용도 나오는지 봤으나 작업복 외에는 이런 예쁜 Haalari는 초등 저학년까지만 입을 수 있는 사이즈까지만 나온다.
이렇게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어서 그런지, 비가 꽤 많이 오는 날도 어린이집 놀이터에는 아이들이 신나게 바깥놀이를 하고 있다. 눈에 비가 들어가도 개의치 않고 그네도 쌩쌩, 옷이 젖는 것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물웅덩이를 철퍽철퍽 걸어 다니기도 하고, 방수 장갑 끼고 모래 놀이도 계속한다. 눈이 와도 마찬가지. 추운 날 비 오는 데 놀이터에서 저러고 놀고 있는 아이들 보면서 처음엔 에고 얼른 안으로 들어가야 하지 않나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는데, 오히려 여기선 날씨에 상관없이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주의라 참 다름을 많이 느낀다.
겨울엔 상황이 더 놀랍다. 해가 뜨는 건지 아예 안 뜨는 건지도 모르는 하루 종일 캄캄한 겨울, 놀이터는 수많은 가로등을 이용해 불을 밝혀 놓고, 아이들은 눈을 퍼 나르며 추운지도 모르고 논다. 초등학교에서는 눈을 치워 쌓아 놓은 눈 산에 자기들 만의 방법으로 미끄럼도 타고, 술래잡기며 숨바꼭질도 한다. 아이들 뿐 아니다. 캄캄하고 추운 겨울 회사원들은 일찍 시작하는 하루 일과에 따라 8시까지 회사에 가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움직인다. 조깅하는 사람들도 딱히 계절을 타는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이런 겨울이 있어서 그런지, 봄이 되고 여름으로 갈수록 사람들은 너무도 행복해진다. 집 여기저기서 바비큐를 하고, 햇빛이 비치는 곳에 의자를 두고 햇볕을 쬐고, MÖKKI라 부르는 여름 오두막집 (아 별장이라고 하기엔 너무 소박하고, 영어로는 summer cabin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에 가서 가족들과 친구들과 함께 할 계획을 세운다. 회사에서 미팅을 들어갈 때마다 느끼지만 사람들이 날씨 이야기로 미팅을 시작하는 게 습관인데, 특히 요즘 같이 화창한 날씨가 몸을 간질일 때면 주말만 바라보고 사는 게 느껴진다.
나의 핀란드에서의 첫겨울은 사실 어리바리 너무도 쉽게 지나갔다. 그도 그럴 것이 APAC timezone에 맞춰서 일하느라 새벽 3시에 일어나서 낮 12시면 일이 끝났던 지라 캄캄할 때 회사에 나갈 일도 없었고 비몽사몽간에 휘리릭 지나가 버릴 수가 있었던 것. 한국에서는 자외선 탓하며 태양을 피하느라 그늘과 실내만 찾았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따뜻한 햇볕을 받는 곳에 앉아서 비타민 D 흡수를 자청하게 되었다니 아직 일 년도 안 된 사이에 일어난 변화치고는 놀랍다. 일단 하지 (이 곳에서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시즌 - mid summer)까지는 날씨에 따른 우리의 기분이 계속 상승할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