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초등학교 1학년이 된 막내가 학교 생활에 적응도 하고 새로운 친구도 사귀면서 집에 친구를 데려오기 시작했다. 어제는 새로 사귄 친구네 집에 놀러 가서 신나게 놀고 친구 엄마와 친구가 친절하게 우리 집까지 데려다주셨더랬다. 오늘 아침에 막내가 어제 재밌었다며 오늘도 가면 안되냐고 물어보길래 미리 친구의 일정이나 부모님 허락 등을 해결하고 가야 한다고 알려주면서 눈치껏 가야지 매일 가면 싫어할 거야 라고 덧붙였다.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핀란드인 남편이 핀란드에는 '눈치' 같은 거 필요 없다며, 본인이 싫다고 느끼면 싫다고 말을 할 거라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보니 한국에 살면서 이 '눈치'없는 남편의 행동 때문에 중간에서 가슴 졸였던 일들도 많았고, 성급한 일반화 일지는 모르겠지만 핀란드 사람들과 일하다 보니 정말 그런 거 같다는 생각도 든다.
한국에서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눈치껏 알아서 척척 해 주길 기대하는 게 있다. 나도 나이가 들어보니 이 눈치껏 잘하는 후배들이 더 센스 있어 보이고 예뻤다. 그리고 상하관계가 아닌 친구 관계에 있어서도 당연히 내가 여러 번 밥을 사면 상대도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반대로 사기도 하고, 내가 좀 신세를 졌다 싶으면 다음엔 보은을 해야 하는 표현되지 않은 "Give and take"가 관계에 깔려 있는 국룰이다.
남편과 체코에서 처음 만나고 아쉬운 마음에 기회가 되면 꼭 한국에 오라고 말을 했는데, 정말 그 해 겨울 남편이 한국에 짠~ 하고 나타났다. 벌써 20년도 전 대학생 때 이야기이긴 하지만 나는 부모님께 용돈 받아 생활하던 시절이었고, 남편 역시 개털인 건 마찬가지였던 때다. 난 한국에 손님으로 온 이 남자에게 사 먹이고 구경시켜 주면서 이 정도 내가 해 줬으면 얘가 한 번 낼 때도 되었는데 맘 속으로만 서운해하며 그래도 끝까지 부모님께 가불을 받아가면서 잘 보살펴 주었더랬다 (아 이때 알아봤어야 했던 건가^^). 이후 6년 반 동안의 장거리 연애 기간 동안 시누이도 친구와 한국에 다녀가고 시부모님도 결혼식 이후 다녀가시면서 이런 손님 대접 에피소드는 수도 없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우리 가족은 호기롭게 "한국에서는 손님은 항상 대접하는 문화가 있다"라고 말하며 이 말 할 수 없는 애매한 give & take가 지켜지지 않음에 서운한 마음이 스멀스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결국 나도 우리 가족도 괜히 온 힘을 다해 잘해 주지 말자며 괘씸한 맘을 표현하는 시점에 다다랐는데..
(사진은 내용과 전혀 상관없는 최고 예쁜 핀란드의 가을 전경 ^^)
문화 차이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진 지금 다시 테이프를 감고 (아 놔, 이 옛날 사람식 표현) 그 시점으로 돌아가서 핀란드 사고방식과 우리네 사고방식을 적용해서 생각해 보자. 한국과 아시아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핀란드 가족들은 본인들이 해 달라고 해서 받은 것도 아닌 이 친절함에 고마운 마음이 들긴 했지만 진심을 담아 고맙다는 말을 전하는 거 외엔 설명된 한국의 문화인 "손님으로서 대접받는 것"을 따르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뭔가 이 사람들이 불편한 게 있다거나 원하는 게 있으면 말을 하겠지 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괜한 second quessing을 하기보다는 서로 투명하게 말하는 게 익숙한 사람들이고 솔직하게 말을 해 준 내용에 대해서는 감정을 담아 서운해한다기보다는 상대가 원하는 것을 말하는 거라고 객관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들이니깐. 핀란드에서는 예의상 해야 하니깐 하고 이 정도 했으면 상대도 하는 시늉이라도 할 테지라며 기대하는 게 없다.
내가 좀 당황했던 에피소드 중 또 하나는 시어머님이 한국에 오셔서 우리 집에서 2주 정도 있다 가실 때 겪은 내용인데, 미리 좀 세팅을 하자면 우리 시어머님은 다른 사람들에게 절대 폐를 끼치지 않으시고, 오실 때에도 선물과 음식을 바리바리 싸 갖고 오시며 중간중간 밥도 사주시고 가실 때에는 돈도 놓고 가시는 산타 같은 마음씨도 착한 분이시다. 우리 집에 머무시는 동안 난 아랫사람으로서 당연히 보살펴 드린다는 마음으로 '이렇게 하면 불편하실 거야''이렇게 하면 더 좋을 텐데'라고 시어머님을 대신해서 생각하면서 내가 결정하고 바꾸고 권하고 했던 부분이 있었다. 한국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아랫사람은 당연히 윗사람을 위해서 미리 생각하고 계산하고 윗사람이 맘에 들어할 거라는 추측과 기대를 바탕으로 행동하고 결정하니깐.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어머님이 내 기대와는 다르게 행동하게 되면 약간은 서운하고 왜 내 마음을 몰라주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내 생각으로는 따뜻한 방이, 내 생각으로는 신선한 해산물이, 내 생각으로는 걸어가는 것보단 택시를 타는 게 시어머님께 더 좋을 거라고 대신 생각하고 추측하여 말을 해 왔던 것이다. 하지만 당연히 시어머님은 본인이 좋아하는 대로 행동하고 음식을 드시고 생활할 권리도 있고 능력도 있다. 내가 서운함을 느낄 때마다 남편이 했던 말은 "불편하시면 말씀하실 거야. 원하시는 게 있으면 말씀하실 거야" 였는데 이제 어느 정도 이 문화에 익숙해지고 나니 이런 방식이야 얼마나 효율적인가 싶다.
반대로 우리 부모님 입장에서는 이 눈치 없는 사위가 외국에 사는 아들을 대신해서 알아서 바비큐 준비도 착착하고, 제사에 필요한 준비도 어머니 아버지가 말씀하시기 전에 도와드리고, 이것저것 불편한 게 있는지 살펴서 고쳐 놓으면 좀 좋을 텐데 눈치 없이 직접 "이것 좀 저기로 옮겨줘"라고 말씀하시기 전엔 멀뚱멀뚱 앉아 있으니 속을 부글부글 끓이셨을 거다.
서로 상대 입장에서 추측해서 행동하고 기대에 맞지 않았을 경우 서로 만족스럽지 못하고,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하는 이 모든 과정 대신, 이상적으로 매우 투명하게 서로가 느끼고 원하는 것을 존중하는 말투로 필터 없이 잘 이야기할 수 있다면 이 보다 더 좋을 순 없을 거다. 나는 성격상 상대의 친절한 배려를 받으면 안절부절 불편한 마음이 생기는데, 상대에 대한 배려가 너무 지나쳐서 내가 스트레스를 받는 상태가 된다면 상대를 대신해서 내가 미리 생각하고 행동하는 게 아닌가 멈추고 생각해 봐야 할 때이다.
양쪽의 문화를 이해하고 중간에서 조율해서 생각할 수 있는 지금이 어쩌면 상황에 따라 모드를 바꿀 수 있어 한층 더 성숙해진 모습인 거 같아 마음에 든다. (소제목에도 적었지만 핀란드 인이라고 다 그런 걸 아님을... 성급한 일반화는 금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