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지하철을 보기 위해 역으로 향하곤 했다. 집 근처 지하철 역에서 지나가는 지하철들을 한없이 보면서 환호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아이의 큰 즐거움 중 하나였다.
시간이 조금 더 여유 있는 날에는 아이와 함께 지하철을 타고 정처 없이 서너 개의 역을 지나 내려서 지하철들을 보고, 다시 반대 방향으로 돌아와 타고 돌아오는 짤막한 지하철 여행을 떠나기도 했었다. 목적지가 없는, 그저 지하철을 타는 것이 목적인 시간이었지만, 지하철을 타고 돌아온 날이면 아이는 무척이나 행복해했다.
한 번은 아이가 4살 때, 하원 후 지하철을 타러 가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어린이집에 가니 선생님께서,
'오늘 어디 가시나 봐요, 엄마랑 지하철 탄다고 자랑하더라고요~' 하셨다.
'아, 정말 지하철을 '타러' 가는 거예요.' 하고 대답하고,
정말 꼬마다운 일이라며 선생님과 함께 웃었던 기억이 있다.
사진을 찍자고 해도 레일을 보느라 엄마를 쳐다볼 수 없는 아이.
어쩜 이렇게 좋아할까, 싶을 정도로 지하철에 푸욱 빠져있는 유아기를 보냈다.
다른 친구들은 유튜브로 장난감을 소개하는 누나들을 볼 때, 아이는 지하철 달리는 영상을 보았다.
다른 친구들이 동요 영상을 보며 노래할 때, 아이는 '서울 지하철'이라는 노래를 따라 불렀다.
1호선 빨간색은 인천 수원 성북 창동 2호선 녹색은 강남 종합운동장 을지 신촌 역 순환선을 오고 간다네 빠르고 안전하게 탈 수 있는 지하철 4호선 파란색은 사당 이촌 명동 상계 3호선 노란색은 양재 고속터미널 옥수 구파발 태극마크는 갈아타는 곳 빠르고 안전하게 탈 수 있는 지하철 (서울 지하철 - 김문진)
처음에는 이런 노래가 있다니, 하면서 가사를 듣고 신기해했고,
그 후에는 4살 아이가 꽤 빠른 박자에 맞춰 열심히 노래를 연습하고 부른다는 게 참 신기했다.
아이에게는 낯설기만 한 역 이름들을 들리는 대로 웅얼웅얼 따라 하는 모습이라니..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사랑스럽고 귀여운 기억이다.
이렇게 지하철을 좋아하던 아이의 꿈은 자연스레 '지하철' 이 되는 것이었다.
4살.
경찰차가 되고 싶고, 카봇이 되고 싶은 아이들이 많은, 아직은 현실성이 없는 또래들처럼 아이 역시 지하철을 꿈꿨다. 그리고 베란다 밖으로 지하철 철로가 내다보여 아이 기준에서는 무척이나 '좋은 집'인 할머니 댁에 갔던 날, 아이는 가족들 앞에서 당당히 자신의 포부를 밝혔다.
"난 나중에 지하철이 될 거야."
어른들은 아이의 귀여운 포부에 웃음을 터트렸고, 나중에 지하철이 되면 할머니를 태워달라, 큰 아빠를 태워달라 하며 아이의 꿈에 호응해주었다.
어른들의 반응에 부쩍 신이 난 아이를 향해, 당시 2학년이던 사촌 누나가 지극히 현실적인 조언을 했다.
"넌 사람이라 지하철이 될 수 없어."
현실성 없는 아이는 당연히 발끈했다.
"왜? 난 지하철 할 거야. 누나 안태워 줄 거야."
빠른 사춘기를 겪고 있었던 것 같은 사촌 누나는 큰 소리로 말대꾸하는 동생에게 아마도 화가 났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평소에 한없이 착하기만 했던 누나는 아이에게 무시무시한 조언을 건넸다.
"너 지하철 되고 싶으면 배에 구멍 뚫어서 바퀴를 달아야 해. 머리에는 전선을 달아야 하고. 문도 달아야 해."
아이의 말이 없어졌다. 아홉 살이라 나이가 엄청 많아 보이고, 무척이나 똑똑한 사촌 누나의 조언이 현실적으로 다가온 것 같았다. 한참을 말이 없이 생각을 하던 아이가 울음을 터트렸다.
"난 지하철 하고 싶은데..... 배에 구멍 뚫기 싫어.........."
4살. 처음으로 가졌던 꿈이 좌절되어버린 아이는 정말 슬프게 한참을 울었다.
지하철이 정말 되고 싶었지만, 배에 구멍을 뚫을 엄두가 나지 않았던 아이는 한참의 고민 끝에, 지하철을 운전하는 사람이 되겠노라 꿈을 바꾸었다. 그리고 7살이 된 지금은 유튜브에서 본 신칸센의 모습에 반해, 신칸센 기관사를 꿈꾸고 있다.
얼마 전 만난 조카는 아이가 여전히 지하철을 좋아하며, 신칸센 기관사가 되겠다고 하자, 문득 지난 이야기를 꺼냈다.
"작은 엄마, 얘 전에 지하철 된다고 했었잖아요."
"응, 그랬었지. 기억 나?"
"네, 제가 그래서 배에 구멍 뚫어야 한다고 했었잖아요."
5학년이 된 조카아이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사촌 동생이 많이 울어서, 그리고 자신도 혼이 나서 3년이나 지난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보다 많이 큰 조카는 이제 기관사가 되겠다고 하는 조금은 더 현실적인 사촌동생의 꿈을 듣고 무척이나 만족스러워했다.
블록을 가지고 놀 때도 지하철을 만들고 놀던 아이..
어린이 티가 제법 나는 7살이 된 지금도 여전히 지하철을 좋아한다.
"지금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이런 안내 방송 놀이를 하던 아이는 이제 유튜브에서 들었던 일본어 안내방송까지 따라 하기 시작했다.
엄마의 기억으로는 4살, 아마도 그전부터 좋아했을 지하철.
7살이라는 짧은 인생의 절반 이상동안 몰두하고 있는 그 꿈이, 마흔이 가까웠지만 아직까지도 내 꿈은 무엇일까를 고민하는 엄마에게는 신기하기도 하고, 기특한 일이기도 하다.
아마 앞으로 아이 앞에 다가올 많은 세월을 살면서, 많은 것들을 경험하면서 아이의 꿈은 바뀌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배에 구멍을 뚫어야 한다는 무지막지 하면서도 현실적인 벽에 막혀 좌절할 수도 있을 것이고, 그런 현실에 맞춰 기관사가 되겠다는 조금은 실현 가능성이 있는 쪽으로 방향을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무한한 꿈을 가질 수 있는 나이, 7살.
나는 엄마로서, 이 아이를 지지하고 응원한다.
부디 아이는 자신이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알고, 그 일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갖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