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청춘런, 그리고 기적의 '소주 20병' 합리화
11월 둘째 주. 2018년의 소위 '3대 메이저 마라톤'이 모두 막을 내렸다. 하지만 우리 오픈채팅방의 열기는 이제 막 끓어오르기 시작한 참이었다. 지난주 JTBC 마라톤에서 누군가는 풀코스의 감동을 맛보았고, 나 같은 누군가는 목이 터져라 응원하며 마라톤의 뜨거운 문화(일명 '마라톤 뽕')에 깊이 취해버렸기 때문이다.
그 주 주말, 여의도에서 '청춘런' 대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여러분, 이번 대회 20명 이상 단체 참가하면 전용 부스랑 현수막을 준대요!" 방장님의 한마디를 신호탄으로, 채팅방은 다단계 영업장(?)을 방불케 했다. 너도나도 "같이 뛰자"며 영업을 시작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때는 대회 전날이나 당일에도 '현장 배번'을 사서 뛸 수 있던 낭만적인 시기였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무려 24명. 우리 오픈채팅방 역사상 역대급 인원이 모인 대규모 오프라인 정모가 성사된 것이다.
대회 당일 여의도. 매일 온라인으로 수다를 떨고 운동 기록(과 소주병) 사진만 공유하던 사람들을 실물로 영접하는 날이었다. 기존에 같이 대회를 나가며 친해진 멤버들도 있었지만, 절반 이상은 난생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처음 모였을 땐 꽤나 서먹서먹했다. 어색한 존댓말과 뻘쭘한 눈빛들이 오갔다. 하지만 그 어색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출발 총성이 울리고 같이 땀을 흘리며 한강 변을 달리기 시작하자, 나이와 실력의 벽은 금세 허물어졌다. '달리기'라는 공통의 언어 하나로 우리는 금세 십년지기 친구처럼 웃고 떠들며 달리게 되었다.
이번 '청춘런'은 여의도에서 출발해 잠실 방향으로 한강을 따라 뛰다 반환하는 10km 코스였다. 하지만 우리에게 기록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번 대회의 테마는 철저히 **'함께 달리는 즐거움'**에 맞춰져 있었다.
발이 빠른 고수 멤버들은 자진해서 첫 대회를 뛰는 런린이들의 페이스 메이커(패매)를 자처했다. 오픈채팅방에 소속감이 단단히 차오른 몇몇 친구들은 아예 크루 깃발을 망토처럼 몸에 두르고 뛰며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기록판을 쳐다보는 대신 서로의 얼굴을 보고, 숨찬 목소리로 "파이팅!"을 외치며 달리는 기분. 마라톤 대회에서 시계를 내려놓고 온전히 축제처럼 '놀 수 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은 날이었다.
나는 동생들을 위해 작은 이벤트를 준비했다. 지난번 웨어러블 런에서 맛보고 반해버린 네덜란드 프리미엄 맥주 '바바리아(BAVARIA)'를 챙겨간 것이다. (물을 타지 않은 맥주로 유명했는데, 아쉽게도 지금은 캔맥주를 구하기 힘들어졌다. 맥주 이야기만으로도 브런치 매거진 하나를 쓸 수 있지만 이쯤 해두자.)
결승선을 먼저 통과한 우리는 준비해 둔 맥주 캔을 시원하게 부딪치며 갈증을 달랬다. 그러고는 다시 주로(달리는 길)로 거슬러 올라가, 아직 달리고 있는 남은 멤버들을 응원하며 다 함께 결승선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야말로 완벽한 크루 러닝의 정석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뼈아픈 시련이 남아 있었다. 신나게 놀고 다 같이 김치찌개 집으로 뒤풀이를 갔는데, 나는 하필 예전 스쿼시를 같이 치던 동생의 결혼식이 있어 식당 문 앞에서 인사만 하고 돌아서야 했다. '아... 마라톤의 꽃은 뒤풀이인데!'
결혼식장에서 뷔페를 먹으며 내 신경은 온통 채팅방에 가 있었다. 얼마 후, 단톡방에 올라온 뒤풀이 인증 사진을 보고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사진 속 테이블 위에는 초록색 소주병이 무려 20개 가까이 도열해 있었다. 평소 같으면 "미친 거 아니야?" 했겠지만, 그날은 달랐다. 우리 방의 숭고한 규칙, '10km당 소주 1병'. 이날 10km를 뛴 멤버가 20명이 넘었으니, 20병을 마시는 건 수학적으로도, 도의적으로도 너무나 완벽하고 합당한 결과였던 것이다. (이렇게 훌륭한 합리화라니!)
참여하지 못해 아쉬움은 남았지만, 사진 속 붉게 달아오른 멤버들의 웃는 얼굴을 보며 나도 덩달아 배가 불렀다.
그리고 이 무서운(?) 사람들과 함께, 우리는 3주 뒤에 열릴 혹독한 **'시즌 마감 마라톤'**을 향해 또 한 번의 질주를 준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