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릴레이 주자, 그리고 혼자 떠난 '공주 런트립'

파워 'I'의 어색한 역사 탐방과 끝없는 훈련의 서막

by 이재민 러닝코치

'청춘런'의 뽕이 채 가시기도 전, 우리 오픈채팅방 러너들의 시선은 이미 다음 목적지를 향해 있었다. 바로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즌 마감 마라톤'**이었다.


이 대회가 우리에게 유독 중요했던 이유가 있다. 바로 풀코스 거리를 7명이 나눠 달리는 '동호회 최강전 릴레이' 부문 때문이었다. 청춘런에서 단체 참가의 짜릿함을 맛본 우리는 "우리도 릴레이 한 번 도전해 보자!"며 의기투합했다. 참가 조건은 남자 4명, 여자 3명으로 구성된 7인 1조. 춘천마라톤 때 만났던 전설의 '홍천 러너'님을 필두로 팀원 모집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우리 채팅방이 어떤 곳인가. 이제 막 달리기를 시작한 '런린이'들이 대부분이고, 순위나 기록을 겨루는 빡센 달리기는 본능적으로 기피하는 평화로운 곳이었다.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자, 불똥은 엉뚱하게도 나에게 튀었다. "형님 잘 뛰시잖아요! 같이 하시죠!" 사람들의 치켜세움에 넘어가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어느새 7인의 릴레이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아... 훈련해야 하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제 겨우 기록을 내려놓고 사람들과 같이 뛰는 '펀런(Fun Run)'의 재미를 알아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기록주'라니. 어쩔 수 없이 운명을 받아들이고 지옥의 훈련에 돌입하게 된 이야기는... 눈물이 앞을 가리니 다음 화에서 자세히 풀어보겠다.



1만 원의 행복, 그러나 파워 'I'에겐 가혹한 시련


시즌 마감 마라톤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 남아 있었다. 그 사이 나는 엑스크루(xCREW)에서 진행하는 '공주 런트립'을 신청했다. 참가비 단돈 1만 원에 왕복 버스, 달리기, 식사, 티셔츠, 특별한 메달까지 포함된 그야말로 '혜자 이벤트'였다. 채팅방에 영업을 해봤지만 아무도 넘어오지 않아, 결국 나 홀로 버스에 오르게 되었다.


출발 당일, 서울에서 런트립 버스에 탑승하고 나는 직감했다. '아, 망했다.' 버스는 이미 거대한 친목의 장이었다. 행사를 주관하는 러닝 전도사와 그 지인들, 단체로 신청한 크루원들 사이에서 나처럼 혼자 온 사람은 고작 5명 남짓해 보였다. MBTI가 'I'로 시작하는 소심한 내향인에게,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단체 여행의 고립감은 생각보다 뼈아팠다.


다행히 옆자리에 앉은 젊은 동생도 혼자 왔다고 했다. 나이 차이는 꽤 났지만, 우리는 '달리기'라는 만능 치트키 덕분에 금세 친해져 대전까지 가는 내내 수다를 떨며 외로움을 달랬다.

image.png 대전 공주 런트립!
image.png 버스를 타고 떠나보자!



달리기인가, 역사 탐방인가


첫 번째 목적지는 대전 시립 박물관이었다. 하필 하늘에선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런트립인데 시작부터 비라고?' 마음이 한풀 꺾였지만, 실내 일정이라 다행이라 위안 삼았다. 이 행사에 대전시의 지원이 있었는지, 대전의 역사와 윤봉길 의사 특별전, 기호학파 전시 등 내용이 꽤 알찼다. 혼자 온 덕분에 나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묵묵히 박물관을 돌며 역사 공부에 매진했다. (언젠가 전국의 지역 박물관만 도는 여행을 해봐도 좋겠다는 꽤 멋진 생각도 이때 처음 했다.)

image.png 비가오는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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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투어를 마치고 우리는 진짜 목적지인 '공주'로 이동했다. 점심 메뉴는 공주의 명물이라는 칼국수. 가게 이름마저 정직한 '공주 칼국수'였다. 왜 공주가 칼국수로 유명한지는 몰랐지만, 식당 안에는 엄청나게 칼칼하고 붉은 칼국수가 우리를 위해 미리 세팅되어 있었다.


매장에 들어간 순서대로 기계적으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버스에서 친해진 동생이 내 맞은편에 앉았고, 이내 혼자 온 다른 참가자 몇몇이 우리 테이블의 빈자리를 채웠다. 아, 역시 아는 사람이 없는 단체 여행의 식사 시간은 숨이 막힌다. "혼자 오셨어요?" "아, 네. 하하. 많이 어색하네요." "그러게요. 하하..."

방금 전까지 대전 시립 박물관에서 기호학파와 윤봉길 의사를 보고 왔지만, 이 뻘쭘한 테이블에서 대전의 깊은 역사를 논할 리 만무했다. 결국 꺼내든 무기는 다시 '러닝'이었다. 어디서 뛰는지, 무슨 신발을 신는지, 공통 관심사인 달리기 이야기로 간신히 침묵을 메웠다. "그래도 칼국수는 맛있네요." 서로 코를 훌쩍이며 칼칼한 면발을 흡입하고, 그릇의 바닥이 보일 때쯤 인솔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 다음 장소로 이동하겠습니다!" 마음의 여유라곤 없는 런트립. 나는 서둘러 입가를 닦고 버스에 올랐다. 바쁘다 바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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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png 나눠먹는 음식은 친한 사람끼리 있을때만 시키자..밥먹는데도 눈치가 보인다


슬픈 전설의 곰사당, 그리고 40명의 스쿼트 군단


배를 채우고 도착한 다음 여행지는 **'고마나루 곰사당'**이었다. 고마나루(熊津). 옛 백제의 수도였던 웅진의 순우리말 이름으로, 직역하면 '곰이 살던 나루터'라는 뜻이다.

이곳에는 조금 기구하고 슬픈 전설이 내려온다. 고마나루 맞은편 연미산에 커다란 암곰 한 마리가 살았는데, 어느 날 지나가던 나무꾼을 굴로 납치해 부부의 연을 맺었다고 한다. 그렇게 곰과 나무꾼 사이에서 두 아이가 태어났다. 둘째 아이가 태어나던 어느 날, 나무꾼은 방심한 틈을 타 배를 타고 강을 건너 도망쳐 버렸다. 뒤늦게 이를 발견한 암곰은 강가로 달려와 울부짖었으나 나무꾼은 돌아보지 않았고, 절망한 암곰은 결국 두 아이를 품에 안고 금강에 투신하고 말았다.

전설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그 후로 금강에 안개가 끼고 배가 뒤집히는 참사가 끊이지 않자, 마을 사람들은 암곰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곰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 그제야 금강의 풍랑이 멎었다는 이야기다.


곰사당은 꽤 멋진 장소에 있었다. 정원으로 꾸려진 언덕위에 작은 사당한채.. 안에는 곰 석상이 있었다. 그 곰석상옆에는 곰인형 두개가 같이 있었다. 동네 사람들이 암곰의 아이들을 옆에 같이 놔둔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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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구슬픈 사연이 깃든 아름다운 곰사당 주변에서 **'플로깅(Plogging)'**을 했다. (어느새 역사 기행문이 되어가는 것 같지만 브런치니까 괜찮다.) 플로깅이란 조깅을 하며 쓰레기를 줍는 환경 운동이다. 주최 측은 단순한 줍기가 아니라, 허리를 굽히지 않고 '스쿼트' 자세로 앉아서 쓰레기를 주워야 진정한 플로깅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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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버스에서 내린 40명의 러너들이 곰사당 주변에 흩어져, 쓰레기가 보일 때마다 단체로 스쿼트를 하는 기이하고도 건강한 풍경이 펼쳐졌다. 허벅지가 뻐근해질 때쯤 플로깅이 끝났고, 우리는 땀 흘린 대가로 예쁜 메달을 받았다. 흔한 쇠붙이가 아닌, 공주의 느낌이 물씬 나는 '도자기 메달'이었다. 내가 가진 수많은 마라톤 메달 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재질의 훈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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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땅은 파기만 하면 유물이 나온다


플로깅 후에도 강행군은 계속됐다. 공주 국립 박물관에 들러 대전 시립 박물관과는 또 다른, 백제 왕국의 국보급 불상과 화려한 유물들을 눈앞에서 마주했다.

마지막 코스는 백제역사유적지구 중 하나인 '공산성'이었다. 역사 해설사님이 동행하며 백제의 숨결을 생생하게 들려주셨다. "공주가 왜 다른 도시처럼 삐까뻔쩍하게 발전하지 못하는 줄 아세요? 여기는 땅만 팠다 하면 고대 유물이 쏟아져 나와서 공사를 할 수가 없어요." 그만큼 공주 전체가 거대한 박물관이라는 뜻이었다. 실제로 2011년 공산성에서는 전설로만 전해지던 '옻칠 갑옷'이 출토되어 역사계를 발칵 뒤집어 놓기도 했다. (2024년에도 또 한 번 옻칠 갑옷이 등장했다며 다큐멘터리까지 나왔다.)

해설사님은 공산성을 거뜬히 오르내리는 우리를 보며 "역시 러너분들이라 체력이 대단하시네요!"라며 엄지를 치켜세우셨다. 성을 내려와 버스에 타기 전, 공주의 명물인 공주빵(밤빵)을 살 시간이 주어졌지만 나는 구경만 하고 돌아섰다.



차라리 내가 기획하고 만다


나의 첫 런트립. 기대를 많이 했지만 솔직한 감상은 '이건 런트립(Run-trip)이 아니라 그냥 수학여행 아닌가?'였다. 공주까지 와서 달리기 대신 스쿼트로 쓰레기를 줍고 걷기만 하다 온 기분이었다. 좋은 취지의 플로깅이었지만 달리는 쾌감을 기대했던 나에겐 조금 아쉬움이 남았다. 게다가 파워 'I'에게 낯선 무리 속의 단체 행동은 여간 기가 빨리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새로운 동생을 알게 되었고, 한동안 연락을 주고받은 인친(인스타 친구)도 생겼으니 아주 남는 게 없는 장사는 아니었다. 귀여운 도자기 메달도 얻었고 말이다.

다만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나는 굳게 다짐했다. '다음부터 런트립은 내가 직접 기획해서, 우리 채팅방 애들이랑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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