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두 명 잡았어!" 그녀의 절규가 나를 각성시켰다.

시즌 마감 마라톤 6인 릴레이, 그리고 크루의 태동

by 이재민 러닝코치

공주 런트립을 다녀온 바로 다음 날, '러너스 레이스'라는 작은 대회에 참가했다. 그런데 신기할 정도로 이 대회에 대한 기억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매주 습관처럼 대회를 나갈 때라, 그저 관성적으로 달리고 밥 먹고 놀다 왔을 거라 추측할 뿐이다.


나중에 사진첩을 뒤져보니 꽤 즐거워 보였고, 무려 10km를 47분대에 주파했다. (이게 당시 나의 최고 기록(PB)이었는지 아닌지조차 가물가물하다. 기록엔 큰 욕심이 없던 시절이니까.) 대회가 끝난 뒤엔 같이 뛴 친구들과 인사동 쌈지길을 걸으며 책과 향수를 사 들고 귀가했다. 아무리 쥐어짜도 레이스 자체의 기억은 없다. 매주 축제처럼 사람들과 어울려 뛰다 보니, 아무런 이슈(?)가 없었던 평범한 대회는 기억의 저편으로 자연스럽게 휘발되나 보다. 달리기와 대회 참가가 내 삶의 완벽한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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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인 릴레이, 작전명 '어쩌다 4구간'


평범한 일상을 지나, 드디어 고대하던 **'시즌 마감 마라톤'**의 막이 올랐다. 이 대회의 꽃은 단연 42.195km를 나눠 달리는 '동호회 최강전 릴레이'였다. 지난 화에서 7인이라고 잘못 기억했는데, 정확히는 남자 4명, 여자 2명으로 구성된 6인 릴레이였다.

코스는 잠실 종합운동장에서 하남 방향으로 달리다 반환하여 양재천을 찍고 돌아오는 루트. 주최 측 규정에 따라 3구간과 5구간은 무조건 여성이 뛰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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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팀의 구간별 작전(?)은 이러했다.

1구간 (7.4km) & 2구간 (6.2km): 남자 멤버 배정. (특히 2구간은 거리는 짧은 편이지만 악명 높은 업힐 '아이유 고개'가 있어 가장 느린(?) 친구가 고기방패처럼 투입되었다.)

3구간 (6.4km): 여성 주자 2명 중 더 빠른 친구(홍천 러너)를 긴 구간에 배치.

5구간 (5.8km): 남은 여성 멤버 자동 배치.

6구간 (8.5km): 거리가 가장 긴 마지막 구간은 팀 내 최고 에이스의 몫.


그렇다면 남은 **4구간 (7.9km)**은 누구 차례인가. "형이 잘 뛰니까 4구간 뛰세요!" 동생들의 뜬금없는 몰표 덕분에, 나는 얼떨결에 팀에서 두 번째로 긴 4구간을 덜컥 맡게 되었다.



벼락치기 훈련, 그리고 아찔한 출석 체크


맡은 거리가 8km에 육박하니 훈련이라는 걸 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해본 훈련이라곤 아파트 단지 뺑뺑이가 전부. 막막한 마음에 러닝 앱을 켜고 '1km 전력 질주' 테스트를 해봤다. 1km를 4분 10초~20초 페이스로 뛰었는데, 정말 폐가 찢어지고 죽을 것 같았다.


'아, 이렇게 뛰다간 8km 가기 전에 황천길을 가겠구나.' 목표 페이스를 4분 25초로 슬쩍 타협했다. 첫날은 1km, 다음 날은 2km, 그렇게 5km까지 거리를 늘려가며 동네를 달렸다. 그리고 훈련의 마무리는 늘 그렇듯 "에라, 될 대로 돼라!"라며 시원한 맥주를 퍼마시는 것이었다.


결전의 날. 릴레이 선수들은 대회 시작 전 출발 순서대로 줄을 서서 출석 체크를 해야 했다. 그런데 5구간을 뛰기로 한 여성 멤버가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실격인가?' 모두의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갈 때쯤, 이동 5분을 남겨놓고 그녀가 극적으로 나타났다. (지각 사유가 굉장히 어이없었는데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십년감수한 우리는 각자의 대기 장소로 흩어졌다.



"오빠, 나 두 명 잡았어!" 절규가 깨운 질주 본능


내가 뛸 4구간은 출발 지점 바로 앞이었다. 바람을 막아주는 임시 천막 하나가 전부였고, 유일한 난방 기구마저 고장 나 있었다. 나는 칼바람을 맞으며 1시간 반에서 2시간가량을 오들오들 떨며 앞 주자를 기다렸다. 추위를 잊으려 천막 앞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웜업만 20분 넘게 했다. (돌이켜보면 이때 체력을 다 까먹은 것 같다.)

"ㅇㅇ번 팀 지나갔습니다!" 무전기에서 앞 주자가 1km 전방을 통과했다는 신호가 떨어졌다. 약 50팀이 참가한 릴레이. 바통(어깨띠)이 교대될 때마다 남은 선수들의 긴장감은 극에 달했다.

저 멀리서 3구간을 뛴 여성 주자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어깨에 매고 있던 띠를 풀러 손에 꽉 쥐고 전력 질주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 손에 띠를 쥐여주며 악에 받친 목소리로 절규했다.


"오빠!! 나 두 명 잡았어!!!"


"으익!" 나는 단발마의 비명을 지르며 어깨에 띠를 맸다. 그녀의 피 토하는 절규를 듣는 순간, '펀런'이니 '완주'니 하는 우아한 단어들은 머릿속에서 하얗게 증발했다.


100미터 앞에 다른 팀 주자 한 명이 보였다. '페이스 조절? 그딴 건 모르겠고 일단 저 사람부터 잡는다!' 다리가 얼어붙었지만 미친 듯이 질주했다. 거리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지만, 이 악물고 달려 기어이 한 명을 제쳤다. 하지만 초반부터 쏟아부은 오버페이스로 다리에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때, 코너를 돌아 양재천으로 진입하는 길에 또 다른 주자가 나타났다. '아... 딱 한 명만 더 잡자!' 다시 한번 풀린 다리에 채찍질을 가하며 4km 지점에서 두 번째 주자마저 추월했다. '아니, 우리 펀런 하자고 모인 초보 방 아니었어? 왜 추월을 하고 난리야!' 속으로 나 자신을 원망하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승부의 세계는 냉정했다. 남은 3km를 버티며 달리는 동안, 천막에서 나보다 늦게 출발했던 다른 팀 에이스 두 명이 쌩하고 내 곁을 스쳐 지나갔다. 두 명을 잡고, 두 명에게 잡혔다. 결국 순위 변동 없는 **'넷 제로(Net Zero)'**의 헛심 공방. 하지만 내 모든 것을 하얗게 불태운 7.9km였다. (나중에 수기로 적힌 기록증을 보니 34분대를 기록했던 것 같다. 스마트워치도 없이 정말 짐승처럼 달렸다.)



얼떨결에 탄생한 러닝 크루의 씨앗


바통 터치를 무사히 마치고, 5구간 대기 장소에 있던 버스에 올라타 꽁꽁 언 몸을 녹였다. 버스가 결승선 경기장에 도착했을 때, 마침 우리 팀의 마지막 6구간 주자가 골인하고 있었다.

최종 성적은 50팀 중 23위. 기록은 4시간 언더(Sub-4). 전문 러닝 크루도 아니고, 그저 달리는 게 좋아 모인 오픈채팅방 오합지졸(?) 초보들이 이뤄낸 엄청난 쾌거였다. 우리 모두의 어깨엔 잔뜩 뽕이 들어갔고, 입가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성취감은 우리를 한 단계 더 높은 곳으로 이끌었다.

뒤풀이 자리, 누군가 상기된 얼굴로 잔을 부딪치며 말했다. "우리... 이참에 정식으로 크루 하나 만들까요?"

마라톤에 미친 직장인의 일상 속에서, 마침내 진짜 '러닝 크루'의 씨앗이 움트는 순간이었다.


아참 여담이지만 이때 릴레이를 완주하고 받은 메달이 풀코스 메달이었다

7.8Km만 뛰고 첫 풀코스 메달이 생겨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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