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민의 '동그라미 세 개'와 다가오는 폭풍 전야
2018년 12월 2일, '시즌 마감 마라톤'을 끝으로 정식적인 마라톤 시즌이 막을 내렸다. 마라토너들의 일 년간의 성취를 겨루는 이 뜻깊은 대회에서, 크루 대항 구간 릴레이 23위라는 쾌거를 이룬 우리 오픈채팅방은 완전히 고무되어 있었다. 뽕이 찰 대로 찬 우리는 드디어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우리도 정식으로 크루를 만듭시다!"
본격적인 창단 작업에 착수하며 필요한 것들을 리스트업 해보았다.
간지나는 크루 이름
우리만의 크루 상징 (마크와 로고)
다 같이 입고 뛸 크루 티셔츠
크루를 이끌어갈 크루장과 운영진
정기 런(정기 모임) 일정
크루의 정체성을 담은 슬로건
관심 있는 사람들이 모여 채팅방에서 밤낮없이 아이디어를 쏟아냈지만, 막상 실질적으로 굴러가는 것은 없었다. 다행히 방 안에 디자인을 업으로 하는 동생이 있어 크루 마크와 로고 디자인을 총대 메고 진행해 주기로 했다. 디자인이 나오는 동안 나머지 일들을 하나씩 풀어나가기로 했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가장 큰 문제는 '크루장'의 부재였다. 처음 채팅방을 개설한 방장은 있었지만, 정식 크루를 이끌어갈 리더로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단체로 대회에 나가고 뒤풀이에서 술잔을 부딪칠 때는 당장이라도 뭐든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세상에 참 쉽게 되는 일 하나 없었다.
생각해 보면 우리 중 제대로 된 러닝 크루를 경험해 본 사람이 거의 없었다. 오픈채팅방에서 모인 사람들이라 대회 때 말고는 밖에서 같이 뛰는 일도 드물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안 되겠다. 다른 크루들은 어떻게 하나 염탐 좀 가보자!" 결국 방장과 크루 창단에 관심 있는 멤버들끼리 서울의 유명 크루들을 탐방(?) 다니기 시작했다. 좌충우돌 크루 스파이 작전에 대한 이야기는 분량이 꽤 길어질 테니, 다음 기회로 잠시 봉인해 두겠다.
크루 창단으로 마음이 들떠있던 이 무렵, 내 지갑도 활짝 열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러너들의 로망, 스마트워치를 장만한 것이다!
나의 첫 스마트워치는 '가민(Garmin) 포러너 35'. 그전까지는 무거운 핸드폰을 손에 쥐고 뛰거나, 웨어러블 런에서 경품으로 받은 스마트 밴드를 차고 뛰었다. 하지만 그 밴드는 GPS 성능이 처참해 도저히 마라톤용으로 쓸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엔 가민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풀코스를 뛰고 온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풀코스 오래 뛰면 핸드폰이나 다른 시계는 배터리가 꺼져요. 천천히 풀코스 완주하려면 무조건 가민이 있어야 합니다!"
마침 12만 원대에 떨이(?)로 올라온 매물을 발견하고 덥석 물었다. 포러너 시리즈 중 가장 낮은 등급의 엔트리 모델이었지만, 나에겐 러닝 기록만 정확히 찍히면 그만이었으니 최고의 가성비 선택이었다.
하지만 진짜 구매 이유는 따로 있었다. 사람들이 채팅방에 운동 인증을 할 때마다 올리는 '가민 커넥트 앱의 동그라미 세 개 화면'. 그게 그렇게 간지나 보일 수가 없었다. 나도 그 세 개의 링을 꽉꽉 채워서 채팅방에 당당하게 인증샷을 올리고 싶었다. (이놈의 허세란.)
가민을 사고 나니 마음의 빗장이 풀린 건지, 연말이라 기분이 붕 떠서 그런 건지, 아니면 정말 달리기에 미쳐버린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뜬금없이 러닝 용품들을 폭풍 쇼핑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지른 것은 지난 JTBC 마라톤에서 적잖은 충격을 받았던 **'3인치 쇼츠'**였다. 짧아도 너무 짧은 그 민망한 마라톤 바지를 남몰래 사서 옷장에 모셔두고, 내년 봄이 오기만을 벼르고 있었다. 이어서 **'남성용 러닝 레깅스'**도 샀다. 태어나서 처음 입어보는 레깅스였다. 원래 나의 겨울 루틴은 따뜻한 실내 헬스장이나 스쿼시장에서 몸을 푸는 것이었는데, 이 영하의 날씨에 야외 러닝을 하겠다고 레깅스까지 사다니. 내가 생각해도 달리기에 단단히 미쳐가고 있었다.
그리고 대망의 가장 큰 지출은 'DJI 오즈모 포켓' 액션캠이었다. 지난번 공주 런트립을 다녀온 뒤, 혼자서라도 달리는 순간들을 영상으로 남겨야겠다는 열망이 솟구쳤다. 고프로보다 조금 저렴하고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이 앙증맞은 캠을 들고 달리는 내 모습을 상상하니 꽤나 즐겁고 짜릿했다.
이 모든 구매는 단 2주만에 일어난 일이다!
12월 내내 크루 창단의 꿈에 부풀어, 양손 가득 러닝 장비를 사들이며 세상 부러울 것 없는 연말을 보냈다. 가민을 차고, 레깅스를 입고, 오즈모 포켓을 든 완벽한 러너의 모습으로 맞이할 희망찬 새해.
하지만 그땐 미처 알지 못했다. 이 폭풍 같은 지출 뒤에, 내 인생을 뒤흔들 진짜 '태풍'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해가 바뀌고 1월, 회사에서 불어닥친 거대한 폭풍은 내 몸을 매섭게 후려쳤고, 결국 머지않아 나를 퇴사의 벼랑 끝으로 몰고 가게 된다.
행복했던 2018년의 끝자락, 폭풍 전야의 달콤한 질주는 그렇게 막을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