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롤스타즈와 맞붙을 뻔했던 게임, & 처참한 사내 정치

2018년 겨울, 멈춰버린 프로젝트와 퇴사를 향한 카운트다운

by 이재민 러닝코치

2018년 12월. 밖에서는 마라톤 시즌 마감의 여운과 크루 창단의 설렘으로 가득했지만, 나의 현실인 회사에는 거대하고 차가운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당시 우리 회사는 거대 퍼블리셔와 손잡고 모바일 멀티플레이 대전 슈팅 게임을 개발 중이었다. 지금도 초등학생들의 '국민 게임'으로 불리며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슈퍼셀의 **'브롤스타즈(Brawl Stars)'**와 비슷한 장르였다. 이 프로젝트는 회사의 부사장님이 강력하게 주도하던 핵심 사업이었고, 나는 개발을 총괄하는 '개발 팀장'을 맡고 있었다.



잘나가던 프로토타입, 그리고 '탱크'의 저주


시작은 매우 좋았다. 약 2년 전인 2017년 초반에 첫 삽을 떠서, 불과 3개월 만에 프로토타입 개발을 완료했다. 이때가 2017년 4월이었다. 그리고 이 프로토 타입은 재미을 인정받아 대형 퍼블리셔의 동남아 지사와 북미 지사에 게임을 보내 검증을 받을 정도로 진행 속도가 빨랐다. 브롤스타즈의 클로즈 베타 테스트가 2017년 6월에 시작되어 2018년 12월에 정식 출시를 했으니, 만약 우리 게임이 정상적인 궤도로 개발을 마쳤다면 그들과 멋진 한판 승부를 벌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가 제공한 프로토타입에 대해 동남아 지사에서는 기립 박수를 치며 "당장 출시합시다!"라는 피드백을 보내왔다. 하지만 문제는 북미 지사였다. "미국 시장에서는 '탱크'라는 소재가 통하지 않습니다. 탱크를 빼주세요."

이 게임은 애초에 부사장님이 "탱크를 소재로 만들어 보자!"라고 기획해서 시작된 프로젝트였다. 그런데 핵심 소재인 탱크를 빼달라니. 이때까지만 해도 경영진이 정말로 게임에서 탱크를 빼버리는 결정을 내릴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어떻게든 프로젝트의 방향성을 지키기 위해 타협안을 냈다. "일단 탱크 게임으로 빠르게 출시해서 게임성을 검증받고 매출을 내봅시다. 그러고 나서 북미 시장에 맞게 캐릭터 위주로 업데이트를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지만 내 의견은 경영진에게 먹히지 않았다. 결국 고육지책으로 '캐릭터를 탱크 위에 태워서 캐릭터 게임으로 포장하자'는 제안을 했고, 가까스로 탱크라는 뼈대를 유지한 채 개발을 이어갈 수 있었다.



사공이 많으면 게임은 산으로 간다


비극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팀 내부에 서서히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 팀의 그래픽을 담당하던 과장님은 개발 이사님의 픽업으로 입사한 분이었다. 그는 입사 당시 게임 그래픽 디렉팅 전반에 대한 막강한 권한을 부여받았고, 자신의 스타일대로 프로토타입을 뽑아냈다. 하지만 부사장님은 그 그래픽 방향성을 몹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잦은 피드백과 마찰이 이어졌다. 그래도 우리는 그래픽 과장님을 밀어주며 프로젝트를 끌고 갔다.


하지만 북미 지사의 피드백 사태 이후, 부사장님 주도하에 새로운 원화가가 낙하산처럼 팀에 합류했다. 기존 직원의 지인이었던 그 원화가는 주로 '일본 미소녀'를 그리던 분이었다. 부사장님은 그 원화가에게 **"디즈니 스타일의 캐릭터를 만들어서 탱크 위에 태워달라"**는 기묘한 오더를 내렸다.


그 순간부터 그래픽의 주도권은 미소녀를 그리던 새 원화가에게 완전히 넘어가 버렸다. 애초에 전권을 약속받았던 그래픽 과장님은 이 상황에 엄청난 불만을 품었다. 설상가상으로 다른 그래픽 팀원들마저 새로 온 원화가와 친하게 지내기 시작하자, 과장님은 팀 내에서 철저히 고립되며 혼자 겉돌기 시작했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메카닉의 끔찍한 혼종


사내 정치가 팀을 병들게 하는 동안, 부사장님의 변덕은 극에 달했다. 야심 차게 만든 디즈니 스타일의 캐릭터가 막상 나오니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더니, 급기야 "탱크 콘셉트를 전면 파기하고 메카닉 대전 게임을 만들자"라고 선언했다.


1년이라는 금쪽같은 시간 동안 캐릭터 그래픽만 엎었다 뒤집었다를 반복하느라 실제 게임 개발은 완전히 멈춰버렸다. 결국 최종적으로 나온 '메카닉 버전'은 탱크, 4족 보행, 2족 보행, 비행기, 수륙양용 등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메카닉이 다 때려 박힌 끔찍한 혼종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운명의 장난처럼 2018년 12월, 브롤스타즈가 기나긴 테스트를 마치고 화려하게 정식 출시를 하던 바로 그 시기에. 우리와 협업하던 퍼블리셔는 냉정하게 **'계약 중단'**을 통보했다.



뼈아픈 배신, 그리고 찾아온 '투명 인간'의 시간


프로젝트가 엎어지자, 그동안 곪아있던 그래픽 과장님의 불만이 폭발했다. 그는 나를 건너뛰고, 심지어 본인을 데려온 개발 이사님에게도 보고하지 않은 채 다이렉트로 부사장님을 찾아갔다. 그리고 최후통첩을 날렸다. "개발 팀장(나)과는 더 이상 일 못 하겠습니다."

나는 곧바로 부사장실로 소환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 아니면 그래픽 과장, 둘 중 한 명이 퇴사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과 마주했다. 기가 막히고 서운했다. 내가 이 회사에 들어와서 망해가는 프로젝트 심폐 소생해서 살려내고, 새로운 프로젝트를 기획해 직원들의 밥줄을 만들어 주고, 그 프로젝트로 인해 이번 탱크 대전 게임 계약까지 따냈는데. 굴러온 낙하산 그래픽 담당자의 불평 한마디에 나를 저울질하다니. 결국 나는 그날부로 회사의 모든 프로젝트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다.


우리가 개발하던 탱크 게임이 캐릭터 문제로 개발 진도가 안 나갈 때, 나는 틈틈이 타 팀의 신규 프로젝트인 방치형 RPG 초안 기획을 전부 잡아주며 참여한 프로젝트가 있어서 차라리 그 프로젝트로 나를 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경영진은 그마저도 거절했다. "그동안 고생했으니 당분간 좀 쉬세요."


회사를 다니면서 일이 주어지지 않는 것. 모니터만 바라보며 하루 8시간을 투명 인간처럼 앉아있는 것. 그것만큼 개발자를 비참하고 미치게 만드는 고문은 없다. 나는 매일 퇴근 후 헛헛한 마음을 술로 달랬다. 결국 그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이듬해인 2019년 3월, 나는 미련 없이 사직서를 던졌다.



달리기, 무너진 자존감을 세워준 유일한 구원


아이러니하게도, 회사에서 철저히 버림받고 붕 떠버린 그 '투명 인간'의 시간은 나를 달리기와 오픈채팅방에 더욱 깊이 빠져들게 만들었다. 회사에서는 쓸모없는 존재가 된 것 같았지만, 퇴근 후 러닝화를 신고 사람들과 달릴 때만큼은 내가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느꼈다. 넘쳐나는 시간과 억눌린 에너지를 크루 창단 작업에 쏟아부었다.


그리고 이 무렵, 우리 채팅방 멤버들을 처음으로 다른 크루와 '합동 러닝'이라는 것을 하게 된다. 힙합 가수 지누션의 '션' 님이 주최하는 '미라클 365 기부 릴레이 마라톤' 이라는 대회에 참가하게 됬는데 94년생 개띠 러너들의 모임인 '멍뭉런' 친구들과 한 팀을 꾸려 참가했던 그 뜨거웠던 대회 이야기는, 다음 장에서 계속 이어가 보겠다.


image.png 션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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