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 질주 후 마시는 콜라의 맛, 그리고 미래의 전설들

2018 미라클 365 기부 릴레이, '멍아리' 팀의 예능 마라톤

by 이재민 러닝코치

2018년 연말, 나는 처음으로 딱딱한 정식 마라톤 대회가 아닌 인플루언서(연예인)가 개최하는 특별한 대회에 다녀왔다. 대회라기보다는 거대한 이벤트나 축제에 가까웠던 그날의 유쾌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대회의 정식 명칭은 "Miracle365 x 위드아이스 릴레이 런". 뚝섬 한강공원에서 열린 이 대회는 6인 1조로 팀을 구성해, 한 명의 주자가 2km씩 총 12km를 릴레이로 완주하는 것이 목표였다.

단순히 달리기만 한다면 발 빠른 사람들이 무조건 우승을 싹쓸이할 게 뻔했다. 그래서 주최 측은 릴레이 교대 과정 중간중간에 '미니 게임'을 배치해 러닝 실력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게 만들었다. 말 그대로 달리기와 예능이 결합된 '예능 마라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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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뭉이와 병아리의 만남, 우리는 '멍아리'


우리 팀은 94년생 개띠 러닝 크루인 '멍뭉런' 친구 2명과, 우리 오픈채팅방 멤버 4명이 연합하여 꾸려졌다. 팀명은 '멍아리'. 멍뭉런을 상징하는 '멍멍이'와 우리 오픈채팅방의 러닝 초보를 상징하는 '병아리'가 합쳐진 이름이었다. 생각보다 꽤 귀엽고 입에 착 달라붙는 팀명이었다.

시즌 마감 마라톤을 뛰고 난 직후인 데다 겨울 한파까지 몰아쳐서, 주변의 많은 러너들이 이미 겨울잠(러닝 휴업)에 들어간 상태였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 되는 사람들끼리 소박하게 모여 대회에 나섰다. 시작 전 우리의 다짐은 굳건했다. "우리 진짜 기록 욕심 1도 내지 말자. 그냥 즐기자!"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막상 출발 총성이 울리자 우리는 누구 하나 빠짐없이 입에 단내 나게 죽어라 뛰고 있었다. 인간의 본능이란 참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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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png 멍아리 화이팅!


호흡 곤란이 불러온 '벌칙' 미니 게임


대회 룰은 간단했다. 한 명의 주자가 자신의 몫인 2km를 전력 질주하고 돌아오면, 바통 터치를 하기 전 순서대로 지정된 미니 게임 하나를 수행해야 했다.


미니 게임은 총 3가지였다.

1번 주자 완주 후: 밀가루를 입으로 불어 사탕 찾기

3번 주자 완주 후: 콜라 캔 빨리 마시기

5번 주자 완주 후: 산수 문제 풀기


우리는 1번, 6번 주자를 '멍뭉런' 친구들이 맡았고, 내가 3번을, 나머지 2번, 4번, 5번 주자를 우리 챗방의 병아리들이 책임지기로 했다. 문제는 우리가 각 번호에 무슨 미니 게임이 배정되어 있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로 순서를 정해버렸다는 것이다. 그 결과, 게임은 순식간에 가혹한 '벌칙'으로 돌변했다.

첫 번째 희생양은 1번 주자(멍뭉런 여자 멤버)였다. 밀가루 쟁반에서 사탕을 찾는 게임 자체는 어렵지 않았지만, 전력 질주 후 거친 숨을 내쉬며 밀가루에 얼굴을 파묻은 그녀의 얼굴은 그야말로 밀가루 범벅이 되고 말았다. 하얗게 칠해진 얼굴로 바통을 넘기는 모습은 웃프기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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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희생양은 바로 3번 주자인 나였다. 나 역시 2km를 미친 듯이 전력 질주하고 돌아왔다. 폐가 터질 것 같은 상태에서 내 앞엔 톡 쏘는 탄산의 '콜라 한 캔'이 놓였다. 숨을 참고 억지로 콜라를 들이붓는데, 식도를 타고 올라오는 탄산 폭풍에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토할 뻔했다. 달리기보다 콜라 마시기가 더 고통스럽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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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희생양은 5번 주자였다. 그녀는 우리 여자 멤버 중 가장 달리기 속도가 빠른 에이스였다. 하지만 전력 질주 후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건 '산수 문제'였다. "아니, 숨차 죽겠는데 숫자가 눈에 들어오겠냐고요!" 산소 결핍으로 뇌 정지가 온 그녀는 쉬운 산수 계산 앞에서 쩔쩔매며 막히는 굴욕을 맛보아야 했다.

비록 게임은 엉망진창이었지만, 애초에 우승하러 온 것이 아니었기에 우리는 배를 잡고 웃으며 신나게 대회를 즐겼다. 다른 크루 분들과 어울리고, 뜻깊은 기부도 하면서 참 따뜻하고 즐거운 겨울을 보냈다.



우물 안 개구리, 넓은 세상을 보다


이 대회의 호스트는 션 님이었지만, 원활한 운영을 위해 '크루고스트(CREWGHOST)'라는 대형 러닝 크루원들이 대거 나와 자원봉사도 하고 달리기도 하며 행사를 돕고 있었다. 약 18개 팀, 총 108명이 참여하는 규모라 션 님 혼자서 감당하기엔 벅차 크루고스트 측에 도움을 요청했다고 한다.

나는 이때 '크루고스트'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되었고, 그 엄청난 규모와 조직력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우리 오픈채팅방 친구들이 아닌 '다른 크루' 사람들과 교류하며 이야기를 나눠본 것도 이날이 처음이었다. 특정 나이대만 모이는 '띠 크루(94년생 멍뭉런 등)'가 존재한다는 것도, 수백 명이 움직이는 대형 크루가 있다는 것도 나에겐 엄청난 신선한 충격이었다. 우물 안 병아리가 처음으로 넓은 러닝 생태계를 마주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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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사진첩을 보며 깨달은 소름 돋는 진실


시간이 한참 흘러, 지나간 추억을 더듬으며 그날의 대회 사진첩을 다시 넘겨보았다. 그런데 1등 팀 멤버들의 얼굴이 어딘가 낯익었다. 자세히 보니, 현재 마스터즈 마라톤계에서 전설을 쓰고 있는 '스톤', '김은섭', '김보건', '이지윤' 선수 등등이 포진해 있는 게 아닌가!

'와... 내가 이런 엄청난 사람들과 같은 하늘 아래서, 같은 공기를 마시며 신나게 달리기를 했었구나...'

몇 년이 지나서야 그날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과 함께 뛰었는지, 그 영광스러운 순간을 뒤늦게 깨닫고 소름이 돋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천진난만하게 콜라를 마시며 캑캑거리던 나의 첫 기부 마라톤은, 그렇게 내 기억 속에 유쾌하고도 위대한 한 페이지로 장식되었다.

image.png 지금도 전설을 쓰고 있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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