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한 러닝머신을 탈출해 '이중생활'을 시작하다
시즌 마감 마라톤과 기부 릴레이 마라톤을 거치며 달리기의 매력에 흠뻑 빠져있을 무렵, 불청객이 찾아왔다. 매서운 12월의 한파였다. 이제 막 달리기에 재미를 붙인 초보 러너에게 영하의 칼바람은 너무나도 넘기 힘든 거대한 장벽이다. 그래서 이맘때가 되면 대부분의 러너들은 밖에서 달리는 것을 접고 기나긴 겨울잠(휴식)에 들어가거나, 따뜻한 헬스클럽으로 피신해 러닝머신(트레드밀)에 의존하곤 한다.
작년까지만 해도 나 역시 '겨울에 무슨 달리기야, 따뜻한 방구석이 최고지'라며 타협하던 입장이었다. 하지만 2018년의 겨울은 달랐다. 내 마음가짐이 달라진 것도 있었지만,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내가 활동하던 초보 오픈채팅방에 같은 인천에 사는 남자 동생이 한 명 있었다. 이 친구와 함께 겨울 훈련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사실 내가 주도해서 훈련을 시작했다기보다는 그 동생이 자꾸 같이 달리자고 연락을 해와서… 어쩔 수 없이 끌려간 것에 가깝다.
이 동생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근육질 몸매에 나보다 달리기 속도도 훨씬 빠른 무시무시한 녀석이었다. 굳이 나랑 뛰지 않아도 될 텐데, 같이 뛸 사람이 없으면 기어코 나에게 연락을 해서 헬스장으로 불러냈다. '아... 나는 남자에게서 자유롭고 싶다고! 왜 칙칙하게 남자 둘이 헬스장에서 이러고 있어야 하냐고!' 속으로 절규했지만, 막상 헬스클럽에 끌려가면 지기 싫은 마음에 러닝머신 속도를 14~16에 놓고 미친 듯이 뛰었다. 그날이 내 인생을 통틀어 러닝머신 위에서 가장 빠르게 달린 날이었으니, 절대 잊어버릴 수가 없다.
그렇게 헥헥대며 뛰고 있는데, 뒷쪽 러닝머신에서 낯익은 붉은색 티셔츠가 눈에 들어왔다. 2017년 아디다스 마이런(MyRun) 대회 기념 티셔츠를 입은 여성분이 달리고 있었다. 마라톤 중독자의 증상 중 하나는, 길거리나 헬스장에서 대회 기념 티셔츠를 입은 사람을 발견하면 속으로 엄청난 내적 친밀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물론 그 여성분과 인사를 나누거나 뭘 어쨌다는 건 절대 아니다. 그저 삭막한 헬스장에서 '동족'을 만났다는 사실 자체가 반가웠다. 마라톤에 단단히 미쳐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쳇바퀴 돌 듯 제자리만 뛰어야 하는 러닝머신 훈련은 너무나 지루하고 고통스러웠다. "도대체 진짜 러너들은 겨울에 어디서, 어떻게 훈련하는 거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주 귀한 고급 정보를 입수했다. '인천 문학경기장 보조 육상 트랙에 비닐하우스가 설치되어 있어, 한겨울에도 따뜻하게 달릴 수 있다!'
정보를 조금 더 캐보니, 그 비닐하우스 트랙에서 훈련하는 인천 지역 러닝 크루인 **'one 크루'**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인스타그램 DM으로 게스트 참가 신청을 보냈다. 물론, 혼자 가기엔 뻘쭘해서 헬스클럽에서 나를 괴롭히던(?) 그 근육맨 동생에게 연락해 같이 가자고 꼬드겼다. (사실 이참에 그 동생을 'one 크루'에 정착시키고 나는 그에게서 훌훌 벗어나려는 아주 시커먼 속셈도 조금 있었다.)
2019년 1월 1일 화요일. 새해 첫날부터 나는 인천 서구에서 지하철을 타고 무려 한 시간을 달려 문학경기장에 도착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one 크루' 사람들이 10명 정도 모여 있었고, 시간이 지나자 20명 가까이 불어났다. 초반엔 꽤 어색했지만, 크루장님이 분위기를 주도하며 새로 온 게스트들을 기존 멤버들에게 친절하게 소개해 준 덕분에 금세 녹아들 수 있었다.
'one 크루'는 인천에서 가장 큰 크루가 되는 것을 목표로, 서구, 연수구, 동구, 남구 등 인천의 각 행정구역을 돌아다니며 정기 러닝을 진행한다고 했다. 이번 새해 첫 모임은 한파를 피해 비닐하우스 트랙에서 훈련하기로 한 것인데, 마침 헬스장을 탈출할 핑계가 필요했던 나와 타이밍이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진 것이다.
본격적인 세션이 시작되었고, 나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그동안 오픈채팅방이나 다른 모임에서는 대충 몸을 풀고 그룹별로 나눠 '무작정 달리기'만 했었는데, 이 크루는 차원이 달랐다. 비닐하우스 트랙을 가볍게 조깅하며 웜업을 끝낸 뒤, 트랙 한가운데 모여 다양한 형태의 **'보강 운동(Drill)'**을 진행했다. 제자리 뛰기 후 전력 질주, 무릎을 높이 들며 점프한 뒤 질주하기 등 러닝 퍼포먼스를 높이기 위한 전문적인 훈련들이었다.
"아, 달리기라는 게 그냥 발만 구른다고 되는 게 아니구나." 무작정 뛰는 것 외에, 달리기에 특화된 진짜 '훈련'을 경험한 것은 내 러닝 인생에서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날의 보강 운동은 내 머릿속에 작은 스파크를 튀겼다. '달리기를 잘하려면 어떤 근육을 써야 하지? 부상을 안 당하려면 어떤 훈련을 해야 할까?'
이때부터 나는 달리기 이론과 훈련법에 대해 깊이 파고들어 공부하기 시작했다. 관련 지식이 하나둘 쌓이다 보니, 어느새 나는 오픈채팅방에서 사람들의 달리기 고민을 들어주고 해결책을 제시해 주는 '달리기의 현자(?)' 같은 포지션에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리고 이 작은 호기심의 씨앗은 훗날 무럭무럭 자라나, 몇 년 뒤 마라톤 팀을 만들고 누군가에게 달리기를 가르치는 '러닝 코치'라는 직업을 갖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훈련이 끝나고 다 같이 밥을 먹으며, 나는 망설임 없이 다음 모임에도 참석하겠다고 약속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 나는 생각했다. '올겨울은 헬스장이 아니라 이 크루와 함께 보내야겠다.'
그렇게 나는, 친목 위주의 '초보 오픈채팅방'과 훈련 위주의 'one 크루'를 오가는, 꽤나 바쁘고 열정적인 러너의 이중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