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요가 매트 위에서, 마라톤은 거들 뿐

2017년 봄, 헬스장 먹튀 사건과 뜻밖의 요가 마라톤

by 이재민 러닝코치

두 번의 마라톤 대회를 무사히 마치고 겨울이 찾아왔다. 나는 계획대로 러닝화를 잠시 넣어두고, 나의 본진(本陣)인 스쿼시 코트로 복귀했다.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고작 5K, 10K 두 번 뛰었을 뿐인데, 겨우내 스쿼시를 치는 내 몸놀림은 부상 전 수준으로 가볍게 돌아와 있었다. 수업을 듣는데 자신감이 뿜어져 나왔다.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빨리 회복했어요?"라고 물을 때마다 나는 마치 전도사라도 된 양 거드름을 피웠다. "마라톤 하세요! 달리기가 답입니다."

겨우 메달 두 개 걸어본 주제에, 그때의 나는 스쿼시 실력보다 '마라톤 완주자'라는 타이틀에 묘한 우월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우월감이 산산조각 나는 데는 보름도 걸리지 않았다.



어느 날, 스쿼시장이 사라졌다


평소처럼 운동을 하러 갔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알고 보니 헬스클럽 주인이 야반도주를 해버린 것이다. 소위 말하는 '헬스장 먹튀' 사건. 새로 온 주인은 "나는 모르는 일이다. 환불은 도망간 전 주인에게 받아라"라며 배를 째라 나왔고, 스쿼시 코트는 이미 철거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회원들은 분노했지만 법적으로 구제받을 길은 요원했다. 다만 새 주인은 기존 회원들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한 가지 제안을 던졌다. "남은 기간 동안 GX(Group Exercise) 프로그램을 무제한으로 이용하게 해 드리겠습니다."

하, 참... 기가 찼다. 하지만 낸 돈이 아까워서라도 뭐라도 해야 했다. 운동하려는 의지보다는 '뽕을 뽑겠다'는 복수심으로 나는 새로 개설된 GX 프로그램에 닥치는 대로 들어갔다.



요가 선생님, 그리고 '입'만 산 마라토너


복수심으로 시작한 운동이었는데, 뜻밖의 복병을 만났다. 요가 선생님이... 너무 예뻤다.

스쿼시고 나발이고, 헬스장 사장이 바뀌건 말건 그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날부로 요가 수업의 모범생이 되었다. 겨울 내내 남자라고는 나 혼자뿐인 요가 교실, 나는 항상 선생님 눈에 가장 잘 띄는 맨 앞자리를 사수했다.

청일점의 전략은 유효했다. 수업 전후로 선생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생겼다. 그러다 훅 들어온 질문 하나. "회원님은 주말에 보통 뭐 하세요?"

이건 기회였다. 뭔가 멋있는 대답을 해야 했다. 내 입에서는 나도 모르게 준비되지 않은 대답이 튀어 나갔다. "아, 저 마라톤 합니다! 주말엔 주로 뛰어요."

"어머! 저도 마라톤 해봤는데!" 선생님의 눈이 반짝였다. 공통 관심사가 생기니 대화는 급물살을 탔다. "나중에 날 따뜻해지면 같이 대회 나가요." "좋죠! 꼭 같이 나가요."

사실 밥 한번 먹자는 인사치레 같은 말이었을 텐데, 사랑에(혹은 썸에) 눈먼 나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그날부터 나는 선생님에게 '진짜 취미'처럼 보이기 위해, 매주 열리는 마라톤 대회를 미친 듯이 검색해 신청하기 시작했다.



달리기를 사랑한 게 아니라, 당신을 사랑한 거야


그렇게 다시 봄 마라톤 시즌이 시작되었다. 선생님을 만날 때마다 "저 이번 주에도 대회 신청했어요"라고 은근슬쩍 어필했다. 선생님은 "우와, 대단하세요"라고 반응해 주셨지만, 정작 본인의 대회 참가에는 별 관심이 없으셨다. (그걸 아주 나중에야 깨달았다.)

대신 우리는 요가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선생님에게 잘 보이고 싶어 요가 동작을 열심히 연구했고, 급기야 요가 자격증 준비까지 하게 되었다. 선생님은 "가르치는 데 재능이 있다"며 대학교수님까지 소개해 주셨다. 지금 러닝 코치를 하고 있는 걸 보면, 확실히 누군가를 가르치는 데 재능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단지 종목이 요가일 뻔했을 뿐.)

그해 봄, 나는 정말 열심히 달렸다.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때의 나는 달리기를 사랑하지 않았다. 처음엔 스쿼시를 위해, 그다음엔 요가 선생님의 환심을 사기 위해 달렸다. 대회 코스가 어땠는지, 기록이 어땠는지는 기억조차 희미하다. 내 머릿속엔 오로지 '이 이야기를 선생님한테 가서 해야지'라는 생각뿐이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기다리던 러브콜이 왔다. "회원님, 이번 주말에 같이 운동하러 가실래요?"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드디어 커플런인가? 핑크빛 로맨스가 꽃피는 춘천마라톤 같은 건가? 설레는 마음으로 따라나선 그곳에서 내가 마주한 것은, 우리가 아는 그 마라톤 대회가 아니었다.


그녀가 나를 데려간 곳은 바로 '요가 마라톤' 대회장이었다. 아... 인생은 정말이지 한 치 앞을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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