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선 친구들과 첫 오프라인 러닝, 그리고 물욕의 20K

"함께"라서 즐거웠고, "신발"이라서 뛰었다

by 이재민 러닝코치

회사, 집, 학교. 평생 나를 묶어주던 이 뻔한 카테고리를 벗어나, 처음으로 '취미' 하나로 묶인 단체 활동이 시작되었다. 바로 '오픈채팅'의 세계였다.

서로 사는 곳도, 하는 일도, 나이도 모르는 사람들이 오직 '달리기'라는 공통분모 하나로 모였다. 메신저만 열면 쏟아지는 이야기들이 처음엔 꽤나 신기했다. 마치 취향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인 독서 클럽 같았달까? 각자 따로 달리지만 채팅방에 모여 서로의 주로와 기록을 공유하는 '따로 또 같이'의 문화. 사람 만나는 게 부담스러운 나 같은 내향인에게도 이 느슨한 연대는 꽤나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물론 그 안에서 수많은 잡담이 오가고 가끔은 투닥거림도 있었지만, 나는 그곳에서 좋은 사람들을 참 많이 만났다.



화면 밖으로 나온 친구들, '아디다스 마이런'


채팅방 인증의 힘이었을까. 다시 달리기에 재미가 붙은 나는 덜컥 마라톤 대회를 신청했다. 2017년 9월, 아디다스에서 주최했던 '마이런(MyRun)'이었다. (지금은 사라진 추억의 대회다.)

깁스를 푼 지 얼마 되지 않아 체력도, 스피드도 바닥이었지만 매일 채팅방에 "오늘도 뛰었습니다"라고 인증하는 재미로 몸을 만들었다. 그러다 대회 날이 다가오자 채팅방 멤버 몇몇이 같은 대회에 나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럼 우리 현장에서 얼굴 봐요!"


처음으로 혼자가 아닌, '남'과 함께하는 러닝이었다. 대회 전 모여서 쭈뼛쭈뼛 인사를 나누고 단체 사진을 찍었다. 같이 몸을 풀고, 출발선에 나란히 서고, 함께 뛰고, 완주 메달을 걸고 다시 사진을 찍고... 뒤풀이 식사까지. 대학교 졸업 이후 이런 동호회 같은 활동은 처음이었다.

기록이나 코스보다, **'누군가와 함께 무언가를 했다'**는 기억이 훨씬 진하게 남았다. 아, 물론 대회 기록은 냉정했다. 열심히 뛰다가 9km 지점에서 체력이 방전되어(퍼져서) 500m를 걸었고, 마지막 500m만 겨우 뛰어서 들어왔다. 기록은 55분 24초. 사진 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나의 성적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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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km 뛰었으니 마셔야지?"... 변질된(?) 뒤풀이


나도 그렇고 멤버들도 그렇고, 한 번 오프라인의 맛을 보니 '러닝 벙(번개 모임)'이 잦아졌다. 그리고 그에 비례해 술 먹는 날도 늘어났다.

우리가 운동에 집중하자며 만들었던 **'10km당 소주 1병'**의 규칙. 이 숭고한 규칙은 어느샌가 **"오늘 10km나 뛰었으니 마땅히 마셔야지!"**라는 합리화의 도구로 변질되어 있었다. 채팅방 운동 인증 게시판에는 러닝 기록만큼이나 초록색 소주병이 쌓여가는 사진들이 자주 올라왔다.

젊고 건강한,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들이 모였으니 당연한 수순이었을까? 그래도 큰 사고 없이 방은 잘 굴러갔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 방의 문을 두드렸다.



인간은 '물욕' 앞에 얼마나 무모해질 수 있는가


그러던 어느 날, 평온하던 내 러닝 인생에 다시 한번 '하프 마라톤급' 거리를 뛰어야 할 시련(?)이 찾아왔다. 범인은 나이키였다.

나이키에서 신상 러닝화를 출시하며 반포 한강공원에서 이벤트를 열었는데, 그 내용이 아주 자극적이었다. "밤 9시까지 와서 뛴 거리를 인증하면 뽑기 기회를 드립니다."

5km, 10km, 15km... 뛴 거리에 따라 뽑을 수 있는 상품 등급이 달랐다.

그리고 대망의 20km 인증 상품에는 **'신상 나이키 러닝화'**가 걸려 있었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무조건 20km를 뛰어야 했다. 내 인생에서 20km 이상을 뛰어본 건 작년 하프 마라톤 대회가 유일했다. 그 이후로 10km 넘게 뛰어본 적도 없는데, 깁스 풀고 복귀한 지 얼마나 됐다고 20km라니.

하지만 사람이 돈에... 아니, 상품에 눈이 멀면 초인적인 힘이 솟나 보다. "다시는 장거리 달리기 안 해!"라던 1년 전의 다짐은, 반짝이는 새 신발 앞에서 연기처럼 흩어져버렸다.

그래, 까짓것 뛰어보자. 신발이 나를 부르는데!

월, 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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