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와 땀, 그리고 '가브리살'로 기억되는 가을의 전설

우당탕탕 춘천마라톤 1박 2일 원정기

by 이재민 러닝코치

반포까지 20km를 달렸던 '물욕 러닝' 이후, 오픈채팅방의 결속력은 더욱 단단해졌다. 우리는 단순한 채팅방 멤버를 넘어, 함께 땀 흘리고 대회를 준비하는 '러닝 메이트'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누군가 외쳤다. "가을의 전설, 춘천마라톤 가야죠!"

춘천마라톤, 일명 '춘마'. 러너라면 누구나 꿈꾸는 메이저 대회다. 대부분 '런린이'였던 우리는 10km 부문에 도전장을 냈다. 물론 우리 방에는 '홍천 러너'라 불리는 재야의 고수도 있었다. 매주 하프를 밥 먹듯 뛰고 풀코스에 도전하는 그는 우리에게 경외의 대상이었다. (대체 왜 이 초보방에 계신 건지는 아직도 미스터리다.)

멤버 대부분이 서울과 인천에 살고 있어 우리는 1박 2일 원정 계획을 짰다. 단순한 대회 참가가 아닌, 여행을 겸한 MT 같은 느낌으로.



1막: 제이드가든의 추위와 가브리살의 온기


10월의 마지막 주말, 나는 멤버들을 픽업해 춘천으로 향했다. 첫 코스는 '제이드가든'. 유럽풍 정원과 가을 단풍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곳이었지만, 이 날따라 바람이 매서웠다. 오밀조밀 예쁜 풍경 속에서 우리는 덜덜 떨며 사진을 남겼다. 이어서 간 유기농 카페의 핑크뮬리 밭에서도 추위와의 싸움은 계속됐다. (2018년, 핑크뮬리는 정말 대유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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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위에 떨던 몸을 녹이러 간 곳은 춘천 명동의 숨은 맛집, '그 남자의 가브리살'. 춘천 하면 닭갈비라지만, 그건 내일 대회가 끝나고 먹을 '승리의 만찬'으로 아껴두었다. 뜨거운 불판 위에서 가브리살이 익어가고, 서비스로 나온 고르곤졸라 피자에 꿀을 찍어 먹으며 소주잔을 기울였다.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온 멤버들까지 합류하니 분위기는 무르익었다. 고기 10인분에 소주 5병... 내일 마라톤 뛰러 온 사람들 맞나 싶었지만, 뭐 어떠랴. 우린 10km니까!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와 '막걸리 마스크팩'을 붙이고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 잘 뛰고 닭갈비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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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막: 폭우 속의 전쟁, 그리고 기적 같은 1시간


투두둑, 투두둑... 새벽녘 창밖에서 들려온 불길한 소리. 눈을 떠보니 아침 7시, 창밖은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어...? 이게 무슨 일이야?"

난생처음 겪는 우중런(雨中Run) 위기였다. 우비 같은 건 당연히 준비하지 않았다. 편의점을 다 뒤졌지만, 우비는커녕 비닐봉지조차 동난 상태였다. 대회장 노점상들의 우비마저 매진. 우리는 결국 비를 피해 지붕 밑에 처량하게 숨어 있었다. 메이저 대회의 뜨거운 에너지? 그런 걸 느낄 새도 없이 '제발 비만 그쳐라' 기도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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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코스 출발 시간, 잠깐 비가 잦아들었다. 우리는 '홍천 러너'님을 응원하러 뛰쳐나갔다. 하지만 선수들이 출발하는 순간 다시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폭우가 쏟아졌다. "비상! 비상! 다시 숨어!"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우리 10km 주자들이 출발할 시간이 되자 거짓말처럼 비가 뚝 그치고 맑은 하늘이 드러났다. 나는 이번 대회의 목표를 '완주'가 아닌, 같이 간 동생들의 **'페이스 메이커'**로 잡고 B조 후미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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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막: 춘천의 3단 언덕 매운맛


출발! 가을의 전설을 느낄 시간이다. 공지천교를 지나고 거대 닭갈빗집들을 지나자마자 춘천의 본색이 드러났다. 업힐(오르막)의 시작. 2km쯤 지났을까? 언덕이 끝나나 싶었는데 코너를 돌자마자 또 언덕, 내리막을 내려가니 다시 회전 후 또 언덕. 3 연속 언덕 콤보. "형, 여기 10km 코스 맞아요?" 동생들의 원망 섞인 눈빛이 느껴졌지만, 나는 묵묵히 그들을 이끌었다. (사실 나도 멘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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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마라톤이 경치 좋기로 유명하다지만, 10km 코스는 냉정했다. 의암호의 절경 대신 아스팔트 언덕과 사투를 벌여야 했다. 그래도 돌아오는 길은 내리막이라 뛸 만했다.

피니시 라인이 보일 때쯤, 나는 단톡방에 카톡을 보냈다. "우리 들어갑니다! 사진 찍어주세요!" 이 순간이 공식 사진 업체 카메라에 찍혔는데, 나중에 확인해 보니 나는 뛰면서 여유롭게 카톡을 보내는 '고인 물 러너'처럼 나와 있었다. (50분 주파의 위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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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막: 집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해


골인과 동시에 다시 폭우가 쏟아졌다. 하늘이 우리를 위해 딱 1시간만 참아준 것 같았다. 대회의 여운을 즐길 새도 없이 다시 지붕 밑으로 피신했다. 그리고 멤버들이 모두 모이길 기대했다. 잠시 후 멤버들이 모두 모이자 다 같이 닭갈비를 외치고 밥 먹으러 이동했다. (이때도 우리 홍천러너는 뛰고 있었다.)


춘천 현지 멤버의 추천으로 찾아간 명동 닭갈비 골목. 입장해서 자리 잡고 대기만 1시간, 식사는 30분 컷. 기차 시간 때문에 허겁지겁 먹고 일어난 멤버들은 결국 기차를 놓쳤고, 내 차는 만석이 되었다. 그렇게 서울로 향하는 무거운 운전이 시작되었다.


아 인생은 불확실함의 연속이라 했던가. 꽉 막힌 강촌의 시골길, 차는 거북이걸음을 하는데 계기판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주유 경고등.' "어떡하지? 어떡하지?"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뒷자리에 앉은 멤버들도 숨을 죽였다. 꾸역꾸역 굴러가 강촌휴게소에서 주유기를 꽂았을 때의 그 안도감이란.

기름을 가득 채우고 서울로 향했다. 지루하고 지루한 운전 끝에 서울에 도착하니 저녁 8시. 에라 모르겠다. "우리 저녁 먹고 갑시다." 다 같이 저녁까지 먹고, 멤버들을 집집마다 데려다주고 인천 집에 도착하니 밤 12시였다. 그리고 그제야 홍천러너의 완주 소식을 알 수 있었다.


그 후 한동안 전쟁 같았지만, 돌이켜보면 시트콤처럼 유쾌했던 우리의 첫 춘천마라톤이야기는 오픈톡방에서 회자되고 회자되었다.


그날 함께 비를 피하고 닭갈비를 볶았던 그 친구들, 다들 어디서 뭐 하고 살려나.

월, 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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