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달리는 즐거움, 그리고 얼굴에 그려진 사자(?) 한 마리
춘천으로 떠났던 1박 2일의 마라톤 여행은 내 러닝 인생의 분기점이 되었다. 그전까지 나에게 달리기란 혼자만의 고독한 싸움이었다면, 춘천 이후의 달리기는 **'함께하는 놀이'**가 되었다.
대학교 MT 이후 처음 느껴보는 단체 여행의 설렘. 온라인에서 만난 낯선 사람들과 그저 '달리기'가 좋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춘천까지 달려가 닭갈비를 먹고 비를 피했던 기억. 지난 15년간 게임 회사 사무실 구석에 박혀 모니터만 바라보던 나에게, 이 땀 냄새나는 연대는 신선한 문화 충격이었다.
나는 변했다. 더 적극적으로 변했다. 오픈채팅방 눈팅족에서, 어느새 "우리 이 대회 같이 나가요!"라고 외치는 주동자가 되어 있었다.
춘천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내가 채팅방에 제안한 대회는 '웨어러블 런'. 디지털 전문 매체 지디넷(ZDNet)에서 주최하는 이 대회는, 작년에 내가 참가해서 블루투스 스피커를 득템했던 기억이 있는, 소위 말하는 '혜자(구성이 알찬) 대회'였다.
"여기 상품 진짜 많이 줘요. 무조건 남는 장사입니다. 같이 가시죠!" 나의 적극적인 영업 덕분에, 비록 4명이라는 소수 정예였지만 우리는 의기투합해 대회장으로 향했다.
웨어러블 런은 기록을 다투는 대회가 아니라, IT 기기와 코스프레가 어우러진 축제 같은 '펀런(Fun Run)'이었다. 행사장 한편에는 바디페인팅 부스가 마련되어 있었다. 맨얼굴로 뛰기엔 뭔가 아쉬웠던 우리는 용기를 내어 줄을 섰다.
내 차례가 되었다. "저... 귀여운 고양이 한 마리 그려주세요." 아티스트 분은 내 얼굴을 잠시 응시하더니 붓을 들었다. 잠시 후 거울을 봤는데... 거울 속엔 귀여운 고양이 대신 엄숙한 사자 한 마리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음, 그래. 내 얼굴에 '귀여운 냥이'는 무리였던 걸까. 털북숭이 사자가 더 어울렸던 걸까.
어쨌든 우리는 각자의 얼굴에 예술(?)을 새기고 10km를 달렸다. 기록 단축을 위한 '빡런(빡세게 달리기)' 따윈 없었다. 가을 정취가 물씬 풍기는 코스모스 밭이 나오면 멈춰 서서 꽃 속에 들어가 사진을 찍고, 특이한 분장을 한 사람들을 만나면 또 멈춰서 같이 셀카를 찍었다. 이건 마라톤 대회가 아니라, 거대한 가을 소풍이었다.
완주 후 무대에서는 코스프레 시상식이 열렸다. 최종 결승에는 할리퀸 분장을 한 여성분과, 닥터 스트레인지 분장을 한 아저씨가 올라갔다. 박빙의 승부가 예상되던 찰나, 닥터 스트레인지 아저씨가 회심의 카드를 꺼냈다. 똑같이 분장한 귀여운 아들을 무대 위로 데리고 올라온 것이다. "아, 이건 반칙이지!" 관객들의 환호성과 함께 몰표가 쏟아졌고, 우승은 그들 차지였다.
재밌는 건, 그날의 인연으로 그 '닥터 스트레인지' 아저씨와는 아직도 인스타그램 친구로 지낸다는 점이다. 알고 보니 올드 프라모델과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덕후' 기질이 나랑 아주 잘 맞았다. 마라톤이 아니었다면 평생 스칠 일 없었을 인연들이 이렇게 쌓여갔다.
그리고 대망의 경품 추첨 시간. 1등 상품인 전기 자전거는 남의 떡이었지만, 나에게도 행운이 찾아왔다. "축하합니다! 스마트 밴드 당첨!"
그동안 스마트 워치가 없어 무거운 핸드폰을 손에 들고 뛰었던 나에게, 이보다 더 완벽한 선물은 없었다. (역시 혜자 대회다!)
대회가 끝나고 춘천에서 올라온 동생까지 합류해 강남에서 뒤풀이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양손 가득한 기념품을 정리하고, 씻고 나와 습관처럼 컴퓨터를 켰다.
예전에는 한달에 하나의 대회만 뛰었지만.. 이제 .. 가장 가까운 날 대회가 없나..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다.
모니터 속 달력의 빈칸을 채워넣는 내 손놀림은 거침이 없었다. 한 달에 한 번? 아니, 이제는 매주 달려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고 했던가. 나는 노를 젓다 못해 아주 모터를 달아버렸다.
그날 밤, 결제 버튼을 연타하며 완성한 나의 11월, 12월 스케줄표는 이러했다.
11월 첫째 주: 메이저 대회의 웅장함, JTBC 마라톤
11월 둘째 주: 젊음을 불태우자, 청춘런
11월 셋째 주: 달리기 겸 여행, 공주 백제 마라톤 런트립
11월 넷째 주: 쉴 틈이 없다, 러너스 레이스
12월 첫째 주: 한 해의 끝까지 달린다, 시즌 마감 마라톤
매주 주말, 서울과 지방을 오가며 도로 위를 달리는 일정. 누가 보면 국가대표 전지훈련 스케줄인 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멈추는 법을 잊은 상태였다.
그렇게 나는, 완전히, 그리고 아주 지독하게 마라톤에 미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