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닐하우스 트랙의 굴욕과 크루의 탄생
2019년 1월 13일 주말, 나는 두 번째 'one 러닝 크루' 훈련에 참석했다. 장소는 어김없이 한겨울 러너들의 성지, 인천 문학경기장 보조 육상 트랙에 설치된 비닐하우스였다. (나중에 사진을 들춰보니) 이날의 훈련 메뉴는 동적 스트레칭, 그룹별 러닝, 그리고 질주 등 꽤 체계적인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먼저 다 같이 제자리에서 몸을 풀고, 트랙을 이동하며 열을 냈다. 본격적인 그룹별 러닝 시간. 페이스는 가장 빠른 5분부터 30초 단위로 나뉘어 6분 30초 그룹까지 형성되었다. 나는 그중 '5분 30초' 그룹에 슬쩍 합류했다. 여기엔 나름의 치밀한 처세술이 숨어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많은 낯선 모임에서는 딱 '중간'만 하는 것이 가장 효율이 좋고 안전하기 때문이다. 나는 빡세게 엘리트 체육을 하러 온 게 아니라, 인천 러너들과의 즐거운 교류를 위해 게스트로 참여한 것이니 중간 그룹이 제격이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가장 빠른 5분 그룹에는 여성 러너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싱글로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건장한 남자에게, 이것은 그룹 선택을 가르는 매우, 아주 중대한 포인트였다!
그렇게 적당한 페이스로 사람들과 비닐하우스 트랙을 뺑뺑 돌았다. 매서운 한파를 막아주어 따뜻하긴 했지만, 수십 명이 뿜어내는 열기 탓인지 왠지 산소가 부족하고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중간중간 비닐하우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야외 트랙을 한 바퀴씩 돌며 찬 바람을 쐬었다. 칼바람이 매섭게 뺨을 때렸지만, 비닐하우스를 탈출할 때마다 느껴지는 그 짜릿한 해방감은 꽤나 중독적이었다.
그룹 러닝이 끝나고 다 같이 모여 대망의 '질주 훈련'이 시작되었다. 제자리에서 통통 점프를 뛰며 몸의 탄력을 극대화한 다음, 앞으로 치고 나가는 전력 질주!
"딱 중간만 하자." 방금 전까지 마음속으로 되뇌었던 나의 다짐은, 질주 훈련 특유의 묘한 경쟁심이 불타오르며 앞을 향해 보기 좋게 고꾸라져 버렸다. 하필 이날 내가 신은 신발은, 지난번 첫 시착에서 내 양쪽 발뒤꿈치를 무참히 박살 냈던 바로 그 **'나이키 줌플라이'**였다.
앞사람을 이기겠다는 일념으로 전력 질주를 하는 순간, 줌플라이 특유의 엄청난 탄성과 앞으로 쏠리는 로커(Rocker) 구조가 내 통제를 벗어났다. 다리가 신발의 탄력을 이기지 못하고 엉켜버린 것이다. "어? 어어어!" 나는 트랙 위에서 붕 날아올랐다. 마치 서커스단의 곡예사처럼, 혹은 액션 영화의 스턴트맨처럼 자연스럽게 어깨로 낙법을 치며 몸을 둥글게 말아 한 바퀴를 그대로 굴렀다.
트랙 바닥에 나뒹군 채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 쪽팔려... 미치도록 쪽팔려...' 황급히 몸을 털고 일어나며 나는 굳게 다짐했다. '아, 줌플라이 이 자식은 진짜 나랑 안 맞구나.' 그날부로 줌플라이는 다시 신발장 깊숙한 곳에 봉인되었다. (물론 반값 세일로 샀다 한들 내 인생에서 가장 비싼 운동화였기에, 훗날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며 기싸움을 하듯 적응 훈련을 강행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날 훈련을 무사히(?) 마치고, 3회 참석 요건을 채운 나는 마침내 one 크루의 '정회원' 자격을 얻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동아 마라톤 풀코스 훈련 프로그램'에 대한 솔깃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당장 풀코스를 뛸 생각은 1도 없었지만, '훈련이라도 한 번 제대로 받아보자'는 마음에 덥석 신청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풀코스 훈련을 결심하니 자연스레 장비 핑계가 떠올랐다. '나이키 줌플라이를 신을 때마다 피를 보거나 하늘을 나니, 이번엔 브랜드를 바꿔보자!' 다음 날 퇴근길, 아디다스 매장에서 폭탄 할인을 한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아울렛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당시 아디다스에서 주력으로 밀던 러닝화(아디제로 3, 아디제로 프라임 등)는 밑창이 종잇장처럼 얇은 '초경량 마라톤화' 일색이었다. 쫀득한 부스트 폼을 탑재해 최고의 레이싱화로 정평이 나 있었고, 러닝화의 무게를 1g이라도 더 줄이기 위해 밑창이 점점 얇아지던 마라톤화 시장 트렌드의 마지막 상징과도 같은 녀석들이었다. 70kg 중반대의 묵직한 내 몸무게로 저 얇디얇은 밑창을 견디며 풀코스를 뛸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무릎이 먼저 바스러질 것 같았다. 결국 나는 빈손으로 매장을 나오며, 얇은 신발들 사이에서 쿠션을 빵빵하게 채워 탄성을 극대화한 '줌플라이(나이키)'의 파격적인 도전 정신에 새삼 박수를 보냈다. (비록 나를 공중제비 돌게 만들었을지라도.)
내가 한쪽에서는 줌플라이와 사투를 벌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풀코스 훈련을 덜컥 신청하며 우당탕탕 달리고 있을 무렵. 우리 오픈채팅방의 크루 창단 작업 역시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었다.
크루장이 십자가를 짊어지기로 결단하고 뜻을 함께할 운영진들이 뭉치자, 오랫동안 표류하던 안건들이 하나둘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정해진 것은 크루의 이름. 오픈채팅방의 정체성을 그대로 살려 **'병아리 러닝 크루'**로 최종 확정되었다.
우리가 내건 슬로건은 명확했다. "달리기를 막 시작한 병아리 러너들이 모인, 초보자 친화적이고 재미있는 크루!"
그리고 일반 러닝 크루의 심장과도 같은 '정기 런'의 룰도 정해졌다. 매주 수요일, 서울 교대 트랙. 아직 멋들어진 크루 로고나 귀여운 캐릭터 디자인은 완성되지 않았지만, 이름과 방향성, 그리고 정기 모임 장소가 정해졌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장족의 발전이었다.
모든 뼈대가 세워진 날, 심장이 두근거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운영진은 단체 오픈채팅방에 역사적인 첫 번째 정기 런 공지를 띄웠다. 병아리 러닝 크루가 마침내 두꺼운 알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왔음을 알리는 힘찬 신호탄이었다.
"병아리 러너들, 가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