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패딩을 입고 달린 첫 벙개, 그리고 산으로 간 러너들

알을 깬 '병아리'와 스펙터클한 주말의 이중생활

by 이재민 러닝코치

2019년 1월 18일. 마침내 역사적인 '병아리 러닝 크루'의 첫 러닝 벙이 열렸다. 약속 장소는 서울 교대 트랙. 이제 막 완장을 찬 크루장과 운영진들, 그리고 오픈채팅방에서 오프라인 크루로의 진화에 관심이 많았던 멤버들이 하나둘 트랙으로 모여들었다.


여전히 숨을 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오는 매서운 한겨울이었다. 우리는 발목까지 내려오는 두툼한 롱패딩을 껴입고 모여, 트랙 위를 가볍게 조깅하며 얼어붙은 몸을 녹였다. 대단한 훈련 프로그램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저 다 같이 모여 뛰고, 단체 사진을 찍고, 앞으로 우리 크루가 나아갈 미래에 대해 왁자지껄 떠드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사실 오픈채팅방 특성상 전국 각지에 사람들이 흩어져 있다 보니, 물리적인 거리의 벽에 부딪혀 오프라인 정기 런 참여율 자체가 엄청나게 높지는 않았다. 다행히 크루로 전환되면서 이탈한 사람은 없었고, 서울과 수도권에 거주하는 친구들이 주축이 되어 꽤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는 모양새였다. 지금껏 마라톤 대회가 열려야만 겨우 얼굴을 보던 사람들을, 평범한 평일 저녁에 만나 일상처럼 함께 달린다는 것. 그 낯설고도 따뜻한 느낌이 참 좋았다. 아, 정말 느낌이 좋았다.

image.png 쌀쌀한 공기의 서울 교대 트랙
image.png 손을 모아서 병아리 러너의 성공을 기원한다


우리의 가훈, #초읽무마


크루의 뼈대가 갖춰졌으니, 이제 우리를 세상에 알릴 '슬로건'이 필요했다. 당시 인스타그램을 기반으로 하는 러닝 크루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일종의 '가훈' 같은 슬로건을 정해 해시태그(#)로 달고 다니는 것이 유행이었다.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 끝에 탄생한 병아리 크루의 슬로건은 바로 **'#초읽무마'**였다. 풀이하자면 이렇다. "초심을 잃지 않고 무사히 완주하는 마라톤 모임"


입에 착 달라붙지 않고 발음하기도 은근히 까다로웠지만, 그래서 오히려 한 번 들으면 절대 잊히지 않는 마성의 슬로건이었다. 시간이 한참 흐른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 슬로건에는 뼈아픈 현실이 담겨 있었다. 당시 우리 방에는 무리하게 달리다 부상을 입거나, 오버페이스로 무사히 완주하지 못하는 '런린이'들이 수두룩했으니까. (나 역시 줌플라이를 신고 공중제비를 돌았으니 할 말은 없다.)



러너들이 산으로 간 이유


병아리들과 회사가 있는 성울에서 평일 트랙을 누볐다면, 주말은 어김없이 인천 'one 러닝 크루'와 함께할 차례였다. 그런데 토요일 주말 행사의 정체가 조금 수상했다. '러닝 크루가 주말에... 등산을 간다고?'

모르겠다, 일단 그냥 따라가 보자! 나는 군대 전역 이후로 거들떠보지도 않던 등산화 끈을 조여 맸다. 같은 지역에 언제든 같이 땀 흘릴 수 있는 모임이 있다는 것은 내 삶의 궤도를 꽤 많이, 그리고 아주 역동적으로 바꿔놓고 있었다.


목적지는 강화도의 마니산. 알고 보니 크루 내에 등산과 캠핑에 진심인 분들이 꽤 있었고, 그분들이 주축이 되어 '블랙야크 100대 명산' 인증 프로젝트 겸 단체 산행을 기획한 것이었다. 우리는 인천에서 대절한 대형 버스에 올라타 강화도로 향했다. 도착 후 여러 그룹으로 인원을 나누고, 각 그룹의 대장 지휘하에 마니산을 오르며 끈끈한 전우애(?)를 다졌다. 매번 뛰기만 하던 평평한 트랙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멤버들과 발을 맞추며 오르는 산행은 생각보다 훨씬 유익하고 즐거웠다.


물론 당시의 나는 오직 마라톤에 미쳐있던 터라 '100대 명산' 같은 거창한 타이틀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래도 기왕 올라온 거, 남들 다 하는 블랙야크 인증 수건을 빌려 들고 정상석 앞에서 정성을 다해 인증샷을 남겼다. '언젠가 달리기가 조금 질리면, 등산도 본격적으로 해봐야지.' 마음속 버킷리스트 한편에 슬쩍 등산을 추가해 두었다.


image.png 등산전에 만난 K 호랑이
image.png 출발전에는 언제나 즐겁다
image.png 하늘이 곰탕이었지만 ....
image.png 그래도 산은 산다운 맛이 있다.
image.png



물 만난 러너들, 'agami'와의 기막힌 교류회


산에서 내려온 다음 날인 1월 20일 일요일. 이번엔 산이 아니라 '물'이었다. 인천 지역의 수영 크루인 **'agami(아가미)'**와의 이색적인 교류회가 열린 것이다.


이 기상천외한 만남은 수영 크루의 크루장님이 러닝을 병행하고 있어서 성사된 특별 이벤트였다. 육지 바보들인 우리 'one 러닝 크루'가 수영 크루에게 달리는 법을 가르쳐 주고, 물개들인 수영 크루가 우리에게 물에 뜨는 법을 가르쳐 주는, 그야말로 종목을 뛰어넘는 대통합의 장이었다.


나로서는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달리기를 매개로 모인 사람들이 산을 오르고, 이제는 다른 취미를 가진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섞여 서로의 세계를 교류하고 소통하고 있었다. 이토록 다채로운 경험들이 훗날 내가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여러 개의 취미 생활에 발을 걸치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image.png 인천 수영 클럽 '아가미' 이름이 너무 좋다.



성장의 공유, 그리고 다음 타깃은 'DRC'


주말마다 나는 one 크루에서 새로운 세계를 배우고, 즐기고, 쑥쑥 성장하고 있었다. 단지 달리기 실력뿐만 아니라, 내 인생의 폭 자체가 넓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얻은 긍정적인 에너지와 노하우들을 다시 '병아리 크루' 운영진들과 아낌없이 공유했고, 그들이 서울에서 배워온 것들을 나 역시 스펀지처럼 흡수했다. 두 크루를 오가는 나의 이중생활은 완벽한 시너지를 내고 있었다.


자, 이제 우리 병아리 운영진들은 머리를 맞대고 다음 작전을 세웠다. "다음 주 수요일에는 서울 도림천을 꽉 잡고 있다는 **'DRC (도림천 러닝 크루)'**를 털러 갑시다!"

합법적 스파이들의 다음 벤치마킹 타깃이 정해졌다.


image.png 2014년부터 운영하는 도림천 러닝 크루 D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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