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림천 러닝 크루(DRC) 방문기, 그리고 다가오는 철원의 재앙
2019년 1월 23일 수요일 저녁. 우리 '병아리 러닝 크루' 운영진들은 합법적 산업 스파이(?) 신분으로 서울 신림동으로 향했다. 타깃은 도림천의 맹주라 불리는 **'DRC (도림천 러닝 크루)'**였다.
DRC의 집결지는 신림의 '커피붕붕'이라는 카페였다. 알고 보니 카페 사장님이 DRC 소속 크루원이라, 정기 런이 있는 날이면 크루원들을 위해 따뜻한 코코아 한 잔과 짐 보관 서비스를 내어주신다고 했다. (TMI 하나 보태자면, 신림점은 폐업했지만 현재 광화문 DDP에서 '광화문 본부(@bb_coffee_roasters)'라는 이름으로 꾸준히 영업 중이시니 근처에 가실 일이 있다면 들러보시길 추천한다. 커피가 참 맛있다.)
운동 시작 전, 사람들은 카페에 모여 코코아를 호호 불며 가볍게 담소를 나눴다. 출석을 부를 때 보니 우리 같은 타 크루 스파이(?) 말고도, 특정 크루에 가입하지 않고 매일 열리는 여러 크루의 정기 런을 메뚜기처럼 순회하는 전문 '게스트' 분들도 꽤 많았다. DRC 정기 런에 처음 온 사람은 우리뿐이라 뻘쭘함이 밀려왔지만, 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어차피 뛰기 시작하면 숨차서 말도 못 해. 따뜻한 코코아나 마시면서 조용히 있자. 튀지 말자.'
출석 체크가 끝나고 다 같이 도림천으로 내려갔다. 본격적인 러닝 전 스트레칭 타임. 그런데 여기서부터 클라스의 차이가 느껴졌다. 요가 강사로 일하는 전문 선생님(크루원)이 앞으로 나와 회원들의 스트레칭을 진두지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 같은 런린이들이 대충 팔다리나 몇 번 털고 마는 수준이 아니었다. 달리는 근육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요가 선생님의 전문적인 스트레칭은 뛰기 전부터 온몸의 세포를 짜릿하게 자극했다.
지역 기반 크루인 DRC는 동네에서 다양한 본업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각자 자신의 전공을 살려 크루 운영을 돕고 있었다. 전에 방문했던 인천의 'one 크루'가 카리스마 있는 크루장의 지휘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군대 같은 느낌이었다면, 도림천은 각자 맡은 역할이 유기적으로 돌아가는 거대한 공장 같았다. '아, 같은 지역 크루라도 리더십의 형태와 운영 방식에 따라 분위기가 이렇게 다르구나.' 스파이로서 아주 값진 깨달음을 얻는 순간이었다.
스트레칭이 끝나고 대망의 페이스 그룹을 나눌 시간이 왔다. A조 4분, B조 4분 30초... 그렇게 30초 단위로 늘어나며 6분 페이스까지 그룹이 촘촘하게 짜였다.
나는 귀를 의심했다. '4분을 뛴다고? 훈련이 아니라 평일 정기 런에서?!' 도대체 이 도림천에는 얼마나 괴물 같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건지, 그룹이 나뉘는 걸 보며 등줄기에 삐질삐질 식은땀이 흘렀다.
곧 내 페이스를 정해야 하는 선택의 순간이 다가왔다. 짧은 시간 동안 내 머릿속은 치열한 눈치싸움과 자존심이 뒤엉켜 복잡하게 돌아갔다. '병아리 크루 운영진 체면에 첫 방문부터 너무 느린 조에서 뛰긴 가오가 안 살고... 그렇다고 오버페이스 하다가 중간에 퍼지면 더 망신인데...' 한참의 짱구 굴리기 끝에, 나는 가장 합리적이고 안전한 타협점인 '5분 페이스' 그룹에 손을 번쩍 들었다. (참고로 같이 간 우리 크루장님은 조용히 5분 30초 그룹으로 스며들었다.)
도림천 크루의 러닝 코스 운영 방식도 무릎을 탁 치게 만들었다. 신림역에서 신도림 방향으로 뛰었다가 반환하는 코스인데, 모든 그룹이 '동시에' 운동을 끝마칠 수 있도록 거리를 조절했다. 예를 들어 페이스가 빠른 4분 조는 10km를 길게 뛰고 오고, 페이스가 느린 6분 조는 6km만 뛰고 돌아오는 식이었다. 평일 정기 런은 언제나 이 도림천 코스만을 고집한다고 했는데, 그 확고함이 곧 DRC라는 크루의 단단한 아이덴티티를 만들어주고 있었다.
숨 가쁜 러닝이 끝난 후, 다시 요가 선생님의 주도하에 꽤 긴 시간 동안 꼼꼼한 쿨다운 스트레칭이 이어졌다. 다 같이 단체 사진을 찍으며 정기 런 일정이 훈훈하게 마무리되었다. 우리는 DRC 크루장님께 인사를 드리며 우리 병아리 크루 홍보도 슬쩍 끼워 넣고, 자주 놀러 오겠다는 기약 없는(?) 멘트를 남겼다.
이날 하루의 벤치마킹은 매우 성공적이었지만, 사실 내 마라톤 인생을 뒤흔든 진짜 수확은 따로 있었다. 바로 이날 정기 런에 참여했던 **'1987년생 토끼띠 청년'**과의 우연한 만남이었다. 훗날 이 청년이 우리 병아리 크루에 합류하면서 나의 러닝 라이프는 또 한 번의 거대한 격변을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그건 나중 이야기고, 당장 내 발등에 떨어진 불은 따로 있었다. 바로 두 번째 런트립, 이름부터 불길한 **'철원 똥바람 마라톤'**이었다.
지난번 공주 런트립의 어색함을 잊어버린 건지, 마라톤이 포함된 여행이라는 말에 홀려 또다시 덜컥 신청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우리 크루원들에게 같이 가자고 동네방네 영업을 뛰었지만, 무자비한 철원 날씨를 직감한 사람들은 아무도 내 미끼를 물지 않았다.
결국 나는 또다시 혼자가 되었다. 살을 에는 한겨울의 철원 칼바람 속에서, 알몸으로 달려야 했던 그 쓸쓸하고도 미치도록 추웠던 재앙 같은 이야기는 다음 화에서 이어가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