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관의 무게와 '러닝 크루학 개론'

오합지졸 병아리들의 좌충우돌 크루 창단기

by 이재민 러닝코치

2019년 1월. 마침내 우리 '병아리' 오픈채팅방을 정식 크루로 전환하자는 구체적인 방향성이 잡혀가고 있었다. 하지만 시작부터 거대한 암초를 만났다. 바로 크루를 이끌어갈 수장, **'크루장'**의 부재였다.

이 문제가 가장 뼈아팠던 이유는 그 누구도 스스로 나서서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라며 총대를 메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픈채팅방 구성원들의 암묵적인 생각은 이러했다. '방을 제일 처음 만든 사람이 크루장을 하는 게 순리 아닌가?' 하지만 정작 방을 처음 개설했던 친구의 입장은 달랐다. 거창하게 크루를 만들어 운영하겠다는 야심 찬 취지가 아니라, 그저 '달리기하는 초보들끼리 소소하게 정보나 나눠보자'는 가벼운 마음으로 만든 방이었기 때문이다. 정식 크루장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그 친구는 상당한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피할 수 없는 왕관의 무게, 그리고 결성된 운영진


결론이 나지 않아 지지부진하던 찰나, 결국 방을 처음 만들었던 방장 친구가 무거운 입을 열었다. "하아... 그럼 제가 크루장 하겠습니다."

왕관의 무게를 견디기로 한 그의 결단과 함께, 막혀있던 진도가 일사천리로 나가기 시작했다. 신임 크루장은 곧바로 자신을 실질적으로 도와줄 수 있거나 성격이 유순한 사람들을 위주로 운영진을 꾸리기 시작했다. 나에게도 운영진 제안이 왔다. 처음에는 '내가 무슨 운영진이야' 하며 고사했지만, 결국 이 오합지졸 런린이(나를 포함)들과 한 배를 타기로 결심했다.


크루장과 운영진의 뼈대가 세워졌으니, 이제 **'크루를 어떤 방향으로 운영할 것인가'**에 대한 치열한 회의가 필요했다. 하지만 여기서도 문제 하나. 우리는 특정 지역 연고지를 기반으로 모인 사람들이 아니었다. 사는 곳이 다 제각각이다 보니, 운영진들끼리 오프라인에서 얼굴 맞대고 회의 한 번 하는 것조차 만만치 않은 미션이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할 건 해야지. 우리는 어렵사리 밤늦게 모여, 각자가 꿈꾸는 크루의 모습과 운영 규칙에 대해 두서없이 아이디어를 쏟아냈다.



플랫폼 전쟁: 카페냐, 소모임이냐, 인스타냐


가장 먼저 결정해야 할 것은 **'크루 운영 플랫폼'**이었다. 그동안 우리가 밖에서 달리며 주워듣고 직접 목격한 타 크루들의 시스템을 하나씩 분석해 보았다.


네이버/다음 카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오래된 크루들의 주 무대. 런린이보다는 구력이 꽤 되는 연륜 있는 러너들이 장기간 활동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카페에 가입해야 하고, 계정이 없으면 새로 만들어야 하는 등 진입 장벽과 접근성이 다소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었다.


소모임 어플: 취미 기반 어플이라 사람을 모으기 쉽고 회원들의 충성도도 높다. 하지만 어플 자체의 채팅 기능이 부실해서, 결국 나중에는 오픈채팅방을 따로 파서 동시 운영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자체 어플: '크루고스트' 같은 초대형 크루는 아예 자체 어플을 만들어버린다. (하지만 개발비와 유지력을 감당할 수 있는 크루가 몇이나 되겠는가. 이건 논외로 쳤다.)


인스타그램 + 오픈채팅방: 당시 러닝 씬(Scene)에서 가장 각광받던 힙한 조합. 크루 공식 인스타 계정을 파서 정기 런이나 외부 게스트 모집 공지를 예쁘게 올린다. 러닝에 관심 있는 젊고 힙한 사람들이 인스타 DM을 보내면, 오프라인 모임을 한 번 같이 한 뒤 오픈채팅방에 초대하여 정식 크루원으로 받는 시스템이다. 네이버 카페보다 접근성이 월등히 높고 벽이 허물어진, MZ세대에게 딱 맞는 구조였다.


분석 결과, 우리 '병아리'는 젊고 가벼운 시스템에 잘 맞는 **'인스타 러닝 크루'**로 방향을 잡았다.



러닝 크루학 개론: 우리는 어디에 속하는가?


플랫폼을 정했으니 다음은 **'정체성'**이었다. 공통된 관심사를 중심으로 모이는 러닝 크루들을 분석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러닝 크루학 개론'을 집필하는 기분이 들었다. 크루의 생태계는 대략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었다.


1. 일반 러닝 크루: 순수하게 '달리기' 자체가 좋아서 만들어진 크루.

2. 지역 기반 러닝 크루: "동네 사람끼리 모여서 뜁시다"를 모토로 하는 지역 밀착형 크루.

3. 띠 러닝 크루: 94년생 '멍뭉런'처럼, 같은 나이(띠) 친구들끼리 허물없이 즐기기 위해 만들어진 크루.


초창기 러닝 붐이 일었을 때는 대형 '일반 러닝 크루'들이 득세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동네 친구나 동갑내기들과 편하게 뛰고 싶어 하는 니즈가 커지면서 '지역/띠 크루'가 매섭게 약진하고 있었다. 같은 지역이나 같은 나이라는 강력한 구심점이 있다 보니 상대적으로 운영이 수월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였다. 나이도, 지역도 제각각인 사람들이 그저 오픈채팅방 하나로 뭉친 우리 '병아리' 크루는 빼도 박도 못하는 **'일반 러닝 크루'**에 속했다. 일반 러닝 크루의 생명줄은 오직 하나, **'정기 런(정기 모임)'**이다. 정기 런이 제대로 운영되지 않거나 재미가 없으면 사람들은 금세 다른 지역 크루나 띠 크루로 넘어가 버린다. 다른 크루와의 피 튀기는 경쟁(게스트 유치)에서 살아남으려면 정기 런을 얼마나 특색 있고 매력적으로 운영하느냐에 사활이 걸려 있었다. 여기서 승리하면 대형 크루로 성장해 각종 제품이나 대회 협찬을 받는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벤치마킹 혹은 스파이: 남들은 어떻게 뛰지?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유지할 무기는 오로지 달리기, 그리고 매력적인 정기 런뿐이었다. "자, 그럼 정기 런 기획 회의를 시작합시다!" 하지만 회의는 다시 끝을 모르는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운영진 중에 제대로 된 크루 생활을 해본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는 게 없으니 획기적인 기획이 나올 리 만무했다.


"안 되겠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직접 가서 몸으로 부딪쳐 보자!" 우리는 결단을 내렸다. 운영진들끼리 뿔뿔이 흩어져 **'다른 크루를 직접 경험해 보고 후기를 공유하기'**로 한 것이다. 이른바 합법적인 산업 스파이, 아니 벤치마킹 작전이었다.


나는 얼마 전 한파를 뚫고 찾아가 보강 훈련의 신세계를 맛보았던 인천의 'one 러닝 크루'에 몇 번 더 게스트로 잠입(?)해 보기로 했고, 서울에 사는 운영진들은 서울의 유명 크루들을 탐방하기로 역할을 나눴다.


늦은 밤. 머리를 맞대고 치열한 시스템 분석과 스파이 작전까지 수립한 우리는 무거운 책임감과 설렘을 동시에 안고 각자의 집으로 흩어졌다. 크루 창단의 밤은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

� 달리기의 즐거움을 함께 나누는 곳, [팀밥러닝]

과거의 런린이가 훌륭하게 성장하여 만든 마라톤 팀 & 러닝 클래스입니다. 혼자 달리기 외로우신 분, 부상 없이 즐겁게 달리고 싶으신 분들은 환영합니다!

팀밥러닝 구경 가기: [https://cafe.naver.com/teamgimbob]

월, 수, 일 연재
이전 21화훗훗훗! 연탄 배달이 인터벌 훈련이 될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