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습 삼아 '동아 마라톤' 풀코스를 뛰겠다는 패기

꼬리에 꼬리를 무는 대회 신청, 그리고 운명의 '보스턴 7'

by 이재민 러닝코치

'철원 똥바람 마라톤'이라는 지독한 극한의 런트립을 다녀온 후, 내 손가락은 나도 모르게 '해외 마라톤'을 검색하고 있었다. '매년 해외여행은 한 번씩 가야지!'라고 벼르고 있던 차에, 여행에 마라톤을 슬쩍 끼워 넣으면 완벽하겠다는 계산이 섰다. 하프 코스 정도는 어떻게든 뛸 수 있는 몸이 되었고, 인천 'one 러닝 크루'의 훈련도 성실히 소화하고 있었으니 근거 없는 자신감이 하늘을 찌를 때였다.


그렇게 나는 일찍 신청할수록 저렴한 얼리버드 프로모션을 타고, 약 8만 원이라는 착한 가격에 **'괌 유나이티드 마라톤'**을 덜컥 결제해 버렸다. 병아리 러닝 크루 채팅방에 괌 마라톤 떡밥을 툭 던졌더니, 지난 춘천 마라톤을 함께했던 남동생이 덥석 미끼를 물었다. (그 동생의 우당탕탕 괌 일정 이야기는 추후 본격적인 괌 여행기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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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코스를 연습 삼아 뛴다고? 꼬리를 무는 대회 신청


괌 마라톤(풀코스)을 신청하고 나니 갑자기 덜컥 겁이 났다. '외국까지 나가서 뛰다가 퍼지거나 몸이 상하면 어떡하지?' 이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해 내가 내린 결론은 실로 기가 막혔다. 괌 가기 전에 한국에서 풀코스를 한 번 '연습 삼아' 뛰어보자는 것.


마침 주변 고수들의 끊임없는 풀러팅(풀코스 + 플러팅)도 있었고, 작년 JTBC 마라톤에서 풀코스를 완주하던 러너들의 웅장한 모습이 눈에 아른거리기도 했다. 게다가 **'동아 서울 마라톤'**은 완주자에게만 특별한 피니셔 티셔츠를 하나 더 준다는 훌륭한 전통까지 있었다. 결국 나는 홀린 듯이 동아 마라톤 풀코스 결제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풀코스를 아주 만만하게, 단단히 쉽게 본 런린이의 치기 어린 패기였다.


동아 마라톤을 신청했다는 소식을 들은 'one 크루' 사람들은 내게 또 다른 미션을 던졌다. "그럼 동아마라톤 3주 전에 열리는 **'고구려 마라톤(32K)'**도 신청하세요."


갑자기 대회를 또 신청하라고? 영문을 몰라 묻는 내게 크루장님은 단호하게 말했다. 고구려 마라톤은 공식 32K 코스가 있는 몇 안 되는 대회로, 동아 마라톤 전 컨디션 점검을 위한 필수 관문이라는 것이다. 만약 이 대회에서 32K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면 풀코스를 뛸 체력이 안 되는 것으로 간주하고 동아 마라톤 참가를 과감히 취소해야 한다는 무시무시한 조건이 붙어 있었다.


순식간에 내 캘린더에는 어마어마한 스케줄이 박혀버렸다.

2월 17일 (내 생일): 고구려 마라톤 32K

3월 17일: 동아 서울 마라톤 풀코스

4월 14일: 괌 유나이티드 마라톤 풀코스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실감조차 나지 않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해맑은 긍정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 모든 대회를 세팅한 날짜가 무려 1월 28일이었다.)



그땐 그랬지, 낭만 있던 마라톤 접수


잠깐 여담을 하자면, 대회를 내 마음대로 신청하고 취소할 수 있었던 2019년은 지금보다 훨씬 마라톤을 즐기기 좋은 낭만적인 시대였다.


유명 메이저 대회라도 대회 직전까지 여유롭게 신청이 가능했다. 그래서 러너들은 '충분히 훈련을 먼저 하고 ➡️ 내 몸 상태에 맞춰 대회를 신청하는' 지극히 정상적인 문화 속에서 달렸다. 덕분에 무리해서 뛰다 부상을 당하는 일도 훨씬 적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피 터지는 티켓팅을 먼저 성공해야 ➡️ 훈련을 시작할 수 있는' 기형적인 구조로 변해버렸다. 선착순 접수에 밀려 대회 신청에 실패하면 달릴 동기부여마저 잃게 되고, 운 좋게 성공했다 하더라도 정작 대회 당일 컨디션이 안 좋으면 '다시 언제 이 대회를 뛸 수 있을지 모른다'는 압박감에 무리해서 출전하다 크게 다치곤 한다.


근무 시간에 열리지도 않는 홈페이지를 부여잡고 새로고침만 눌러대며 시간을 날려야 하는 작금의 마라톤 문화. 인기를 너무 급하게 태우다가 금방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잿더미로 만들어버릴까 봐 두렵기까지 하다. 체육회를 비롯한 주최 측이 늘어난 마라톤 인구를 건강하게 소화할 방법을 시급히 고민해야 할 때다. 급하게 먹는 밥은 반드시 체하는 법이니까.


갑자기 너무나 진지모드가 켜졌다.! 진지모드를 끄고 이야기를 이어가겠다.

image.png 매번 이게 뭐하는 것인가 싶다!



운명처럼 만난 구원자, 아디다스 보스턴 7


다시 2019년 1월로 돌아와서. 모든 우주의 기운이 나를 마라톤의 길로 인도하듯, 장비 세팅마저 착착 진행되었다. 당시 나는 나이키 줌플라이를 신을 때마다 공중제비를 돌거나 다치는 바람에 새로운 러닝화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내 타깃은 **'아디다스 아디제로 보스턴 7'**이었다.


당시 아디다스의 메인 레이싱화는 '아디오스 3'였지만, 쿠션이 종잇장처럼 얇아 나 같은 헤비 러너에겐 무리였다. 그보다 쿠션이 조금 더 두껍게 들어간 '보스턴 7'이 절실했다. 하지만 이 녀석은 국내에서 인기가 지독하게 없어서 물량 자체를 찾기 힘들었다. 러닝화 전문 매장도 없던 시절, 이런 비주류 신발은 국내에 들어오자마자 악성 재고 취급을 받으며 아울렛으로 직행해 자취를 감추곤 했다. (심지어 해외엔 예쁜 색상도 많은데, 우리나라는 늘 우중충하고 칙칙한 색만 수입해 왔다.)


그런데, 퇴근길에 홀린 듯 들른 회사 근처 아울렛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구석 매대에 딱 하나 남은 보스턴 7을 발견한 것이다. 그것도 황금 사이즈인 270! 나는 망설임 없이 녀석을 낚아채 결제하고 집으로 모셔 왔다. 널찍한 발볼에 부스트 폼이 빵빵하게 들어간 보스턴 7은 족저근막염과 지간종을 달고 사는 내 마당발에 그야말로 '찰떡'인 구원자였다.

image.png 이게 왠 횡재?
image.png 새신을 신고 뛰어보자 '보스턴 7'



월 200km 마일리지의 늪, 그리고 명절 LSD


새로운 무기까지 장착했으니 이제 본격적인 겨울 훈련에 돌입할 차례였다. 나의 한 주 스케줄은 숨 막히게 돌아갔다.


수요일: 병아리 크루 정기 런

금요일: one 크루 정기 런

일요일: one 크루 마라톤 팀 훈련

주 3회 정기 러닝으로 차근차근 풀코스를 준비했다. (그래 봐야 고구려 32K 대회가 고작 3주 앞이었으니 벼락치기나 다름없었지만.) 병아리 챗방의 고수들은 "풀코스를 뛰려면 최소 월 마일리지 200km는 채워야 한다"고 조언했다. 한 주에 50km를 뛰어야 한다는 소리인데, 10K, 15K, 20K로 나눠 뛰기엔 내 다리가 버텨주질 못할 것 같았다. 결국 정기 런이 없는 날에도 동네를 5km씩 뛰며 꾸역꾸역 마일리지를 채워 나갔다.


image.png 수요일은 서울 교대 병아리 정기런


image.png 금요일은 인천을 돌며 one 크루 정기런
image.png 주말은 비닐하우스 트랙에서 훈련 훈련 !


그리고 마침내 코앞으로 다가온 민족 대명절, 설날. 일반인들에겐 전을 부치고 세배를 하는 날이겠지만, 러너들에겐 기나긴 연휴를 틈타 장거리 러닝(LSD)을 뛰는 이른바 **'명절런'**의 날이었다.


이 설날 연휴, 나의 이중생활을 책임지던 'one 러닝 크루'와 '병아리 러닝 크루'의 역사적인 첫 콜라보레이션 러닝이 막을 올릴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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