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병아리 티셔츠의 소속감, 그리고 눈 내리는 워크숍

두 크루의 역사적인 명절 연합런, 그 뜨겁고도 시린 일주일

by 이재민 러닝코치

2019년 2월 6일. 민족 최대의 명절, 설날 연휴가 찾아왔다. 일반인들에게 명절은 고향에 가거나 푹 쉬는 날이겠지만, 달리기 중독자들에겐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닌다. 휴일이 길수록 평소엔 시간적 여유가 없어 하지 못했던 '초장거리 훈련(LSD)'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이른바 **'명절런'**의 시즌이기 때문이다.


명절이라는 거대한 핑계 삼아 평소보다 훨씬 긴 거리를 달리는 러너들만의 대축제. 장거리 러닝에 전혀 관심 없던 런린이들조차 주변의 엄청난 열기(와 풀러팅)에 휩쓸려 자신도 모르게 장거리를 뛰게 되는 마법 같은 기간이다.


나는 이 명절 연휴의 마지막 날, 내가 몸담고 있는 두 곳—'병아리 러닝 크루'와 인천 'one 크루'—양쪽 단톡방에 동시에 명절런 벙개(번개 모임)를 쳤다. 집결지는 인천대공원. 이곳은 공원 내 차량 운행이 전면 금지되면서 수도권 러너들의 성지로 떠오른 곳이었다. 호수를 끼고 도는 평탄한 3km 코스부터, 공원 전체를 크게 도는 5km 코스, 그리고 외곽으로 빠져나가 군부대를 찍고 돌아오는 10km 코스까지 입맛대로 코스를 짤 수 있었다. 게다가 업힐과 다운힐이 절묘하게 반복되는 요철 구간까지 있어, 지루할 틈 없이 장거리 훈련을 소화할 수 있는 완벽한 요새였다. (심지어 외곽 군부대 앞 약수터는 훌륭한 무료 급수대 역할까지 해주었다.)

image.png 거대한 인천 대공원 입구..공원 출입은 무료다.
image.png 차가 다니지 않는 3차선 도로.. 봄에는 벗꽃이 찬란하다
image.png 여기가 최고의 급수대 이다.



명절런 전야제: 강한 형님의 쿨한 퇴장


명절런 당일에 앞서, 나는 하루 전날 'one 크루'에서 만난 형님 한 분과 미리 인천대공원 코스 답사를 겸해 달리기를 했다. 그런데 훈련을 무사히 마치고 옷을 갈아입으러 지하철역 사물함으로 향하던 길에, 믿을 수 없는 비극이 벌어졌다. 그 형님이 계단을 내려가다 발을 잘못 디뎌 발목이 완전히 돌아가는 큰 부상을 당하고 만 것이다.


당시 나는 그 형님을 개인적으로 만난 것이 처음이었고, 얼굴을 본 것도 고작 서너 번에 불과했다. "어, 어떡해! 형님, 괜찮으세요?!" 같이 땀 흘리며 운동을 잘 끝내놓고 평지 계단에서 부상이라니. 나는 패닉에 빠져 어쩔 줄을 몰랐고 그저 발만 동동 굴렀다.


하지만 고통 속에서도 형님은 무척이나 쿨했다. "괜찮아, 괜찮아. 어서 집에 가." 잔뜩 쫄아있는 나를 오히려 안심시키며 집으로 돌려보내는 그 뒷모습. (크으, 강한 형님 정말 멋있어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형님의 첫 풀코스 마라톤을 향한 원대한 장거리 훈련은 그날 계단에서의 부상과 함께 허무하게 막을 내리고 말았다.



서울 병아리와 인천 러너들의 만남, 그리고 굴쏘


다음 날, 본격적인 '명절 연합런'의 막이 올랐다. 참석 인원이 엄청나게 많진 않았지만 라인업은 꽤 알찼다. 병아리 크루에서는 인천의 러닝 코스가 궁금했던 호주 유학파 런린이 소녀, 나와 괌 마라톤을 함께 가기로 한 남동생, 그리고 내가 인천 크루로 꼬드겼던 근육맨 동생이 참석했다. 인천 one 크루에서는 봄의 풀코스 마라톤을 대비해 장거리 숙제를 해치워야 하는 현지 고수?? (아니 런린이) 러너들이 합류했다.


이날의 모임은 평일엔 서울로 출근해 '병아리'로 살고, 주말엔 인천에서 '원 크루' 생활을 하던 나의 이중적인(?) 러닝 정체성을 완벽하게 하나로 묶어주는 뜻깊은 자리였다. 우리는 각자의 페이스에 맞춰 인천대공원 안팎을 돌며 무려 **21km(하프 코스)**를 달렸다.


훈련이 끝난 뒤엔 당연히 영양 보충이 이어졌다. 메뉴는 싱싱한 굴과 소주! 우리 방의 철칙인 '10km당 소주 1병'의 법칙에 따르면 21km를 뛰었으니 각자 2병씩은 거뜬히 비워야 마땅했다. 하지만 나는 차를 끌고 왔다는 치명적인 실수 때문에, 내 앞에서 달게 소주를 들이켜는 사람들을 눈으로만 마시며 쓰린 입맛을 다셔야 했다. 아, 통재라.


image.png 아!! 칼을 들고 굴만 까다 왔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병아리가 되기 위하여


명절 연합런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 나의 마라톤 시계는 무섭게 돌아갔다. 조만간 열릴 32km 대회인 '고구려 마라톤'의 배번호와 기념품이 집으로 배송되었고, 무엇보다 가장 가슴 벅찬 선물이 도착했다.

오랜 기간 공들였던 우리 병아리 크루의 공식 로고와 심볼 작업이 드디어 끝났고, 그 로고가 박힌 **'공식 크루 티셔츠'**가 제작되어 수요일 정기 런에서 배부된 것이다. 가슴팍에 샛노란 병아리 한 마리가 커다랗게 얼굴을 내밀고 있는, 조금은 유치하지만 미치도록 귀여운 우리의 첫 유니폼이었다.


그 노란 티셔츠를 입는 순간, 말로 다 할 수 없는 묵직한 감동이 밀려왔다. '아, 드디어 우리가 진짜 크루가 되었구나.' 단순한 티셔츠 한 장이 주는 '소속감'은 상상 이상으로 거대했다. 우리는 비록 지금은 뒤뚱거리는 런린이들에 불과하지만, 언젠가 세상에서 가장 빠른 병아리가 되기 위해 치열하게 몸부림치겠다는 다짐의 상징이기도 했다.

image.png 2019년 고구려 마라톤 배번
image.png 가장 빠른 병아리가 되겠다!



눈 내리는 워크숍, 조직의 부속품이 되다


하지만 크루가 안겨준 뜨거운 소속감의 온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현실의 차가운 칼바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루 티셔츠를 품에 안고 행복해하던 그 주, 회사에서 청천벽력 같은 지시가 내려왔다. '전사 워크숍 필히 참석 요망.' 나는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저기요... 저 곧 퇴사할 사람인데, 퇴사자한테 워크숍이 웬 말입니까?"


사실 내 퇴사는 프로젝트 공중분해 이후, 회사의 개발 분위기가 어수선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경영진과 관리자들 선에서만 공유된 극비 사항이었다. 일반 직원들에게는 철저히 비밀로 부쳐져 있었다. 회사 측의 논리는 기가 막혔다. "팀장님이 워크숍에 빠지면 다른 직원들이 분위기 이상하다고 오해할 수 있으니까, 그림을 맞추기 위해서라도 무조건 가셔야 합니다."


어이가 없었다. 프로젝트를 엎어버리고 나를 내쫓다시피 등 떠밀 때는 언제고, 남은 직원들의 분위기 관리를 위해 병풍 역할을 하러 오라니. 나는 철저하게 조직의 분위기 유지를 위한 도구이자 부속품으로 전락해 있었다.


"하아... 그래, 가서 아무것도 안 하고 숨만 쉬다 오자." 결국 나는 영혼을 집에 두고 억지로 워크숍 버스에 올랐다. 한쪽(러닝 크루)에서는 내 존재 자체가 환영받고 끈끈한 소속감을 느끼는데, 다른 한쪽(회사)에서는 철저한 소외감과 비참함을 느껴야 했던 일주일. 회사가 사람을 얼마나 무미건조한 도구로 취급하는지 뼈저리게 느낀 씁쓸한 시간이었다.


하필이면 마음이 가장 시리던 그 워크숍 날, 야속하게도 하늘에서는 펑펑 하얀 눈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image.png 홍천 팔봉산 아래서.. 웃자 ! 웃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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