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타인 초콜릿과 32k, 그리고 필름 끊긴 생일 파티

고구려 마라톤, 크루의 낭만과 블랙아웃 사이에서

by 이재민 러닝코치

비밀 퇴사자 신분으로 억지로 끌려온 홍천 리조트의 워크숍. 저녁 식사를 기다리며 멍하니 시간을 죽이고 있을 때, 스마트폰 화면이 반짝였다. 내 브런치 글에서 어느덧 자취를 감췄던, 바로 그 '요가 선생님'이었다.

"오빠 어디입니까?" "어, 나 워크샵 와있는데. 홍천이야." 나의 무미건조한 답장에 그녀는 사진 두 장과 함께 짧은 글을 보내왔다. "내가 발렌타인데이라 초콜릿을 만들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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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속에는 정성스레 직접 만든 수제 초콜릿이 담겨 있었다. "으잉?!" 그렇지 않아도 겉돌며 우울했던 워크숍이, 그 문자를 받는 순간 백 배는 더 우울해졌다. 당장이라도 이곳을 탈출해 서울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단체 버스에 실려 온 처지라 첩첩산중 홍천을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워크숍 끝나고 올라가서 보자!!" 아쉬움을 꾹꾹 눌러 담은 문자를 남기고 그날의 대화는 마무리되었다.


이후 나는 사람들에게 질질 끌려다니며 볼링을 치고, 영혼 없이 바비큐 파티 고기를 뒤집으며 기나긴 워크숍의 밤을 버텼다. 다음 날 이른 아침, 눈 쌓인 리조트 등산로를 홀로 산책하며 복잡한 마음을 달랜 뒤 부리나케 인천 집으로 돌아왔다. 내일은 대망의 **'고구려 마라톤(32km)'**이 열리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image.png 우울할때는 고기가 최고다!



런린이의 첫 '레디샷', 왜 허니버터칩이 거기서 나와?


워크숍에서 복귀하자마자 숨 돌릴 틈도 없이 대회 준비를 시작했다. 내 인생 첫 32km 마라톤. 지금까지 하프(21km) 이상 뛰어본 적이 없었기에 긴장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러너라면 마땅히 해야 한다는 **'레디샷(Ready Shot: 대회 전날 장비와 복장을 바닥에 가지런히 펼쳐두고 찍는 인증 사진)'**도 난생처음 세팅해 보았다. 고이 모셔둔 병아리 러닝 크루 공식 티셔츠와 러닝화, 배번호를 나란히 눕혔다. 그런데 대회장으로 챙겨갈 쇼핑백 안에 웬 '허니버터칩'이 떡하니 들어있었다. 아마도 워크숍에서 남은 과자를 무의식중에 야무지게 챙겨 온 모양이었다. (나란 놈의 식탐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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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고구려 마라톤은 나에게 참 많은 '처음'이 교차하는 날이었다.

'병아리 크루' 공식 티셔츠를 입고 출전하는 첫 단체 대회

인천 'one 러닝 크루' 가입 후 나가는 첫 단체 대회

인생 최초의 32km 장거리 도전

그리고 무엇보다, 내 생일날 열리는 마라톤!

온갖 특별한 이벤트가 겹치다 보니 긴장감보다는 들뜨고 설레는 마음이 훨씬 컸다.



40명의 크루원, 32km를 밀어주는 거대한 소속감


대회장인 잠실 종합운동장에 도착하니 그 규모가 입을 떡 벌어지게 했다. 이번 대회는 단체 참가자(20명 이상)에게 바람을 피할 수 있는 천막 부스를 지원해 주었다. 우리 '병아리 크루'는 '93 닭띠 크루'와 연합하여 부스를 받았고, 인천 'one 크루'는 자체 인원만으로 넉넉히 부스를 배정받았다. 이쪽저쪽 합치니 무려 40명이 넘는 거대한 인원이 한데 모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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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까지만 해도 혼자 묵묵히 뛰거나, 고작 10명 남짓한 소소한 인원과 달렸던 나에게 이 대규모 인파가 뿜어내는 에너지는 엄청났다. 북적이는 천막 안에서 느껴지는 든든한 소속감에 가슴이 웅장해졌다. '오늘 부상 없이 완주해서, 워크숍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한 방에 날려버리자! 그리고 다음 주에 요가 선생님 만나면 32km 거뜬히 뛰었다고 자랑해야지!' 나는 비장하게 각오를 다지며 출발선에 섰다.

image.png 어느 때 보다 비장했다.
image.png 비 장 했 다!

오늘의 목표 페이스는 1km당 5분 20초. 잠실 경기장을 빠져나와 한강 변을 달리고, 반포를 찍고 반환하여 양재천으로 접어드는 코스. 인천 촌놈에게 한강을 달리는 기분은 그 자체로 황홀했다. 게다가 양재천은 15년 전, 내 인생 첫 직장이 있던 곳이 아니던가. 익숙한 풍경을 두 발로 달리다 보니 20대 시절 첫 사회생활을 시작하던 풋풋한 내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마라톤은 단순히 몸을 혹사시키는 운동을 넘어, 잊고 있던 낡은 추억들을 눈앞에 스크린처럼 틀어주는 참 낭만적인 스포츠다.

image.png 한강을 질주하다!
image.png 핸드싸인은 잊지않고 해줘야 한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나는 32km 내내 놀라울 정도로 완벽하고 '이븐(Even)'하게 5분 20초 페이스를 유지하며 결승선을 통과했다. 무엇보다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응원'이었다. 먼저 도착한 크루원들이 짐을 찾고 다시 주로로 나와 장거리 주자들을 애타게 기다려주었다. 커다란 크루 깃발을 펄럭이며 내 옆을 나란히 뛰어주는 동료들, 힘들어 죽겠는 내 얼굴을 스마트폰 영상으로 남겨주는 동생들. 모두가 목이 터져라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부르며 응원했다.


https://photos.app.goo.gl/PRghFfV56ee5YgHf8


나 역시 결승선을 통과하자마자 다시 주로를 거슬러 올라가 아직 달리고 있는 동료들을 목청껏 응원했다. 함께 달리고 서로를 끌어주는 이 짜릿한 문화는, 우리를 단순한 모임이 아닌 진짜 '팀(Team)'으로 묶어주고 있었다.



생일 케이크, 그리고 기억에서 삭제된 2차


대회가 성공적으로 끝나고 40명의 인원이 옹기종기 모여 단체 사진을 남겼다. 이후 서울의 병아리들은 93 크

루와 함께 서울에서 뒤풀이를 가졌고, 나는 one 크루 사람들과 함께 인천으로 넘어가 성대한 마라톤 뒤풀이를 열었다. (지금이야 예전만큼 술을 마시지 않지만, 이때만 해도 '먹기 위해 달린다'고 할 정도로 대회나 훈련이 끝난 뒤의 술자리는 러너들의 숭고한 일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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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png 올림픽 경기장 앞에서 찍은 단체 사진!! 그시절 추억이다


인천에서 다 같이 고기를 굽고 술잔을 부딪치며 32km 완주의 쾌감을 나누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크루장님이 등 뒤에서 불이 켜진 케이크를 들고 나타났다. "여러분!! 오늘 김밥(나의 크루 닉네임) 형님 생일입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서프라이즈 파티. 생일날 달린 인생 최장거리 32km, 완벽하게 달성한 목표 기록, 그리고 크루원들이 불러주는 생일 축하 노래까지. 나는 벅차오르는 감동에 순간 울컥해버렸다. 평생 잊지 못할 최고의 생일이었다. 그 감동의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 크루장님이 쐐기를 박았다. "그러니까, 오늘 영광스러운 이 자리는 생일자 형님이 쏘세요!!!" 알코올과 뽕(?)에 한껏 취해 있던 나는, 그 자리에서 호기롭게 1차 계산서를 시원하게 긁어버렸다. (물론, 나중에 총무가 정산해서 다시 돌려주긴 했다.)


문제는 다음 날 아침이었다. 잠에서 깨어 크루 단톡방에 올라온 어제 뒤풀이 사진들을 쭉 넘겨보는데... 어라? 사진 속에 내가 '2차' 술집에 앉아 아주 해맑게 잇몸을 만개하며 웃고 있는 게 아닌가.

'어... 난 분명 1차 계산한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2차는 대체 언제 간 거지? 왜 저기서 저렇게 웃고 있지?'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혹시 내가 술김에 무슨 대형 사고라도 친 건 아닐까? 나는 떨리는 손으로 크루장님에게 조심스럽게 개인 카톡을 보냈다. ["크루장... 어제 나 혹시 실수한 거 없지...? 나 2차 기억이 하나도 안 나..."]

몇 분 뒤, 크루장님에게서 칼답이 날아왔다. ["형님... 실은 저도 2차부터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납니다!!!"]

그렇게 2차 단체 사진 속에서 세상 가장 행복하게 웃고 있던 크루장과 나는, 그날 밤의 기억을 영원히 블랙홀로 날려버린 채 우당탕탕 고구려 마라톤을 아름답게(?) 마무리했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숙취와 32km의 근육통을 안고 영혼 없이 회사에 출근했다가, 무려 1년 동안이나 연락이 끊겼던 요가 선생님의 수제 초콜릿을 받기 위해 설레는 마음으로 신촌행 지하철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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