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주 남친과 백수의 자존감, 그리고 마지막 초콜릿

커리어도 연애도 내려놓은 자리, 마라톤이 찾아오다

by 이재민 러닝코치

고구려 마라톤의 뜨거웠던 여운이 가시기도 전, 나는 얼마 남지 않은 회사 생활을 정리하기 위해 다시 출근길에 올랐다. 워크숍이 끝나자 회사는 기다렸다는 듯 동료들에게 나의 퇴사 소식을 알려도 좋다고 허락했다. 그리고 회사하고는 3월 초까지만 출근하고 남은 기간은 쌓인 휴가를 모두 털어 사용하며 정식으로 마무리를 짓기로 했다.


내가 속해 있던 팀은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이제 회사에서 내 책상 위에 놓인 일거리는 단 하나도 없었다. 마음이 떠난 자리에는 공허함만 남았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출근해서 온종일 새로운 마라톤 대회를 검색하고, 우리 '병아리 러닝 크루'의 정기 런을 어떻게 하면 더 재밌게 꾸릴지 고민하다가 퇴근하는 생활을 반복했다.


그래도 회사에서 새로운 즐거움을 찾았다. 그 유일한 즐거움은 점심시간이었다. 내가 추천해서 입사했던 친한 형님이 있어 둘이서 오붓하게 맛집을 찾아다녔다. 늦게 복귀해도 누구 하나 눈치 주는 사람 없는, 그야말로 '말년 병장' 같은 생활이었다. (사실 군 시절 바로 위 고참만 13명이라 정작 군대에서는 누려보지도 못한 신선놀음을 퇴사를 앞두고서야 해보게 된 셈이다.)



밥 먹는 요가 선생님과 닫혀 있던 마음의 꿈틀거림


팀히 해체된 월요일 퇴근시간만 기다렸다. 퇴근 시간만을 기다린 이유는 있었다. 바로 그 '요가 선생님'을 만나기로 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여전히 예전에 우리가 처음 만났던 헬스장에서 GX 프로그램을 지도하고 있었다. 사실 마음만 먹었다면 진작 만나러 갈 수도 있었겠지만, 한 번 고백했다가 빛의 속도로 차였던 쓰린 기억 때문에 굳이 연락하지 않고 살았다. 그런데 발렌타인 초콜릿 문자를 계기로 다시 만나게 되니, 묻어두었던 설렘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들어선 헬스장. 아는 트레이너는 한 명도 없었지만, 수업을 준비하던 요가 선생님이 나를 반겼다. 그녀는 잠시만 기다리라며 따뜻한 파카를 챙겨 입고 밖으로 나왔다. "오빠, 초콜릿이 생과일로 만든 거라 보관이 어려워서... 그냥 내가 다 먹어버렸어. 대신 내가 맛있는 밥 사줄게!"


그 말에 나는 내심 놀랐다. 지금까지 내 기억 속의 선생님은 늘 방울토마토만 씹고 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아, 이 사람이 밥을 먹는구나.' 함께 식탁에 마주 앉아 밥을 먹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왠지 모를 좋은 신호 같아, 닫혀 있던 내 마음이 다시금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근처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겨 그간의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눴다.



건물주 남자친구, 그리고 도망치고 싶었던 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과거의 '그날'로 흘러갔다. "오빠는 왜 그렇게 한 번에 포기했어? 빛의 속도로 차였어도 한 번 더 밀어붙였으면 내가 넘어갔을 텐데..." 그녀의 말은 비수처럼 가슴에 박혔다. "그럼... 지금은?" 내 물음에 그녀는 현재 만나는 남자가 있다고 답했다. 그런데 초콜릿은 내 것만 만들었다고? 도대체 알 수 없는 여자의 마음이었다.


그녀의 현재 남자친구는 소위 말하는 '건물주'라고 했다. 딱히 하는 일은 없지만 시간이 많아 매번 그녀를 데리러 오고 데려다주는 사람. 쇼핑도 같이 가고 여행도 함께 가지만, 정작 그녀에게는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고 했다. 그저 자신을 옆에 끼고 다니는 예쁜 '액세서리'처럼 취급하는 느낌이라며 씁쓸해했다.


그 틈 사이로 내가 들어갈 여지는 분명 있어 보였다. 하지만 곧 백수가 될, 직장 없는 남자의 자존감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에이, 그 남자 별로네. 빨리 헤어져."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정작 나는 그녀를 붙잡지 못했다. 마라톤 동호회에서는 그렇게 자존감 높고 자신만만하던 '김밥 형님'이, 현실의 연애 앞에서는 한없이 못나고 작아지는 중이었다. 자존감 없는 백수가 되어가던 그 시간, 그게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몇년이 지난 지금 멀리서 그때의 내 모습을 바라보니 참 못나게 살았다 싶다. 결국 수업 시간이 되어 그녀는 다시 헬스장으로 돌아갔고, 나는 혼자 신촌 거리를 지나 집으로 돌아왔다.



연애도 직장도 가고, 마라톤이 남았다


집에 돌아오니 방 한구석에 택배 봉투가 하나 놓여 있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봉투를 뜯어보니 **'경기 국제 하프 마라톤'**의 배번호와 기념 티셔츠가 들어있었다. "응? 이건 또 언제 뛰는 대회야?" 날짜를 확인하니 바로 이번 주말이었다. (나란 인간은 대체 대회를 얼마나 신청해둔 건지...)

image.png 경기 국제 하프 마라톤대회. 언제 신청한건지..왜또 21K인건지 ㅋㅋㅋ


요가 선생님과의 이별을 추억하며 슬퍼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당장 다가올 수요일에는 세로수길 '브룩스 러닝 센터'에서 열릴 우리 병아리 크루의 정기 런을 챙겨야 했고, 주말에는 하프 마라톤을 뛰어야 했다.

image.png 지금은 사라진 세로수길 브룩스 러닝 허브


회사도, 연애도, 모두 내 손을 떠나 멀어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된 그 순간, 나는 마라톤에 가장 깊게 집중하고 있었다. 직장이 없어도, 사랑이 떠나도, 내 다리는 여전히 달릴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까.


내 인생에서 가장 고독하면서도 가장 뜨겁게 달렸던, 진짜 마라토너의 시간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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