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여름, 나의 마라톤은 핑크빛이 아니었다
마라톤 대회 신청으로 삭제되어 버린 나의 주말들. 무서운 속도로 단축되는 10km 기록, 그리고 날이 갈수록 탄탄해지는 몸뚱아리. 이 모든 눈물겨운 변화의 원동력은 단 하나, '요가 선생님' 때문이었다.
봄부터 여름의 입구에 들어설 때까지 나는 거의 매주, 혹은 격주로 마라톤 대회에 나갔다. 언젠가 선생님이 "우리 같이 대회 나가요"라고 했던 그 약속, 그 핑크빛 주말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하루에 두 번 선생님의 요가 수업을 듣고, 헬스를 하고, 주말에는 마라톤을 뛰는 삶. 야근과 모니터 불빛에 찌들어 살던 게임 기획자는 어느새 태릉선수촌 입소를 앞둔 듯한 '전문 운동인'의 삶을 살고 있었다.
결과는 놀라웠다. 2016년 운동을 시작하기 전 83kg이었던 몸무게는 반년 만에 70kg 근처까지 내려왔다. 무려 13kg 감량. 체지방률은 12~15%를 유지했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만약 선생님이 약속을 조금 더 일찍 지켰더라면, 나는 이렇게 완벽한 몸을 만들지 못했을 거라고. (사랑의 힘은 실로 위대하고, 짝사랑의 힘은 더 독하다.)
계절은 어느덧 봄을 지나 여름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난번 요가 수업 후, 드디어 선생님에게 러브콜을 받았다.
"회원님, 주말에 뭐 하세요?"
"네? 저... 아무것도 안 하는데요!" (격하게 아무것도 안 한다.)
"그럼 이번 주말에 시간 좀 비워두세요. 같이 가요!"
"네네! 무조건 비우겠습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드디어 데이트라니. 그간의 고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번 주말은 내 인생의 봄날이 되리라.
하지만 그 설렘은 반나절을 가지 못했다. 탈의실에서 트레이너 선생님들이 나누는 대화를 듣고 말았다.
"이번 주말에 요가 선생님하고 회원들 데리고 일산으로 홍보하러 가요. 요가 마라톤 있거든요."
아... 데이트가 아니구나. 헬스클럽 홍보 지원군으로 차출된 거구나.
잠시 씁쓸했지만, 긍정 회로를 돌렸다. '그래도 주말을 하루 종일 같이 보내는 게 어디야?' 그렇게 나는 부푼 마음을 안고 일산 킨텍스, '요가 마라톤' 대회장으로 향했다.
우리가 흔히 아는 마라톤이 아니었다. '요가 마라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해외 유명 요가 셀럽들이 무대에 올라 본인의 프로그램을 시연하고, 참가자들이 종일 그 동작을 따라 하는 극한의 수련회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네 가지 충격적인 진실과 마주했다.
첫째, 여기엔 '일반인'이 없다. 주변을 둘러보니 취미로 요가를 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듯했다. 참가자 전원이 현직 요가 선생님들이거나 수련을 아주 오래 한 고수들이었다. 나 같은 '헬스장 요가 6개월 차'가 낄 자리가 아니었다.
둘째, 여기엔 '남자'도 없다. 아니, 딱 한 명 있었다. 바로 나. 수백 명의 여자 요가 선생님들은 형형색색의 전문 요가복(레깅스)을 입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헐렁한 일반 운동복 반바지를 입은 남자는 나 혼자였다. 꽃밭에 잘못 들어온 잡초가 된 기분이었다. 심하게, 아주 심하게 민망했다.
셋째, 무대 위 남자 선생님들의 위엄. 참가자는 여자뿐이었지만, 해외에서 초청된 유명 강사들은 모두 남자였다. 그중 서핑 요가를 가르치던 선생님의 동작은 경이로울 정도였다. (영어로 진행해서 뭐라는지는 몰랐지만, 몸으로 이해했다.)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역시 남자는 요가인가? 나도 자격증을 따야 하나?'
넷째, 등짝의 비극. 이날의 하이라이트였다. 뜨거운 땡볕 아래 야외 광장에서 수련이 이어졌다. '다운독(Down Dog)' 자세를 수없이 반복했는데, 헐렁한 내 티셔츠가 자꾸 말려 올라갔던 모양이다. 집에 와서 거울을 보니 등허리와 엉덩이 골 바로 윗부분만 빨갛게 익어 있었다. 그 민망한 라인 그대로 화상을 입은 것이다. (선생님, 보셨나요...?)
마지막 순서는 명상 요가였다. 이미 체력은 바닥났고, 햇빛은 너무 뜨거웠다. 선생님과 나는 눈빛을 교환했다. "우리 이제 할 만큼 했죠?"
"네, 도망가요."
우리는 마지막 시간을 땡땡이치고 대회장을 빠져나왔다. 회원과 강사가 아닌, 남자와 여자로서 나란히 걸으며 주차장으로 향했다. 사는 곳, 일하는 시간, 소소한 이야기들이 오갔다.
"오늘 같이 와줘서 정말 고마워요."
선생님의 인사에 나는 용기 내어 답했다.
"별말씀을요. 다음엔 우리 밥 한번 같이 먹어요."
그렇게 훈훈하게 헤어져 시동을 걸려는 순간. 끼릭, 끼릭... 자동차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배터리가 방전된 것이다.
선생님과 주말을 보낸다는 생각에 너무 들떠서였을까, 아니면 내 모든 에너지를 요가 매트 위에 쏟아부어서였을까. 차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긴급출동 서비스를 기다리며 멍하니 하늘을 봤다. 어쩌면 이 방전된 배터리는 내 짝사랑의 결말을 미리 보여준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의 첫 요가 마라톤은 끝났다. 그리고 슬프게도, 선생님과의 인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