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나의 마라톤 이야기 5화

짝사랑은 끝났고, 목 메는 소보로빵만 남았다 : 48분의 기록

by 이재민 러닝코치

방울토마토

일산 킨텍스에서의 뜨거웠던 요가 마라톤 이후, 선생님과의 관계는 확실히 가까워졌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체육관 안에서'의 이야기였다.

우리가 얼굴을 마주하는 시간은 내가 퇴근 후 신촌으로 달려가 운동을 하는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딱 두 시간뿐이었다. 그 외의 시간은 철저히 분리되어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나의 집은 인천, 회사는 서울 구로디지털 단지, 선생님의 집은 남양주였다. 수도권 삼각지대도 아니고, 물리적 거리가 너무 멀었다.

어렵게, 정말 어렵게 저녁 식사 약속을 잡은 적이 있다. 하지만 멀리 가지도 못하고 저녁수업 전 헬스클럽 앞 식당에 마주 앉았다. 나는 밥을 먹는데, 그녀는 방울토마토를 꺼냈다.


"선생님, 밥 안 드세요?"

"저 보디빌딩 비키니 부문 대회 준비 중이라 식단 조절해야 해요."


나는 죄지은 사람처럼 밥을 삼켜야 했다. 그때 들은 그녀의 스케줄은 충격 그 자체였다. 평일 저녁엔 헬스장 순회 수업, 주말 오전엔 개인 트레이닝, 주말 오후엔 PT 수업. 중간중간 짬이 나면 쇼핑하고 커피 한 잔 마시는 게 그녀 인생의 전부였다. (그러니까 연애를 못 하지! 아, 내가 할 말은 아닌가?)



썸인 줄 알았는데, 포즈 코치라니


틈이 없었다. 내가 비집고 들어갈 시간적 여유가 그녀에겐 없었다. 대신 우리는 기묘한 '운동 파트너' 같은 사이가 되었다. 선생님은 대회용 의상(비키니)을 고르는 것을 도와달라고 하더니, 급기야 포즈 점검까지 부탁했다.


"회원님, 이 영상 보고 자세 좀 봐주세요."


나는 영상을 보며 포즈가 어색한지, 근육이 잘 보이는지 피드백을 해주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남의 동작을 분석하고 교정해 주던 그 경험이, 10년 뒤 내가 마라톤 코치가 되는 데 결정적인 밑거름이 될 줄은 그때는 꿈에도 몰랐다.

우리는 꽤 친해졌지만, 연애와는 거리가 먼 친구 같은 사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거절, 그리고 도망치듯 시작된 달리기


그 무렵, 운명의 장난처럼 다른 요가 선생님(이하 선생님 2)이 내게 호감을 표해왔다. 그녀는 나이도 어렸고, 심지어 헬스장 바로 뒤에 살았다. 이성적으로는 선생님 2를 만나는 게 맞았다. 하지만 내 마음은 이미 선생님 1에게 깊이 박혀 있었다.

결국 나는 선생님 2의 고백을 정중히 거절하고, 무모하게 선생님 1에게 고백했다. 결과는? 빛의 속도로 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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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그쵸? 우리 그냥 편하게 지내요."


쿨한 척했지만, 쪽팔림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헬스장을 그만두었고, 그녀와는 가끔 안부 톡이나 주고받는 사이로 멀어졌다.

운동선수처럼 살다가 갑자기 운동을 뚝 끊으니 몸이 근질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다시 러닝화를 신었다. 퇴근 후 아파트 단지를 도는, 나의 첫 러닝 루틴으로 돌아간 것이다.



소보루빵과 우유, 그리고 외로움


이제 달리기의 목적은 '사랑'이 아니었다. 목표가 사라지니 나는 '기록'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대회에 나갔다. 뛰는 순간만큼은 회사 일도, 집안일도, 짝사랑의 아픔도 잊을 수 있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죽을 것 같은 고통이 오히려 잡념을 없애주었다.

그때쯤 10K 기록이 48분대까지 줄어들었다. 아마추어치고는 꽤 빠른 기록이었다. 하지만 결승선을 통과했을 때, 예전 같은 완주의 쾌감은 없었다. 온몸에 힘이 빠져나간 탈진 상태뿐이었다.

기념품으로 받은 소보루빵과 미지근한 우유 비닐팩을 들고 대회장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우적우적 빵을 씹는데, 그날따라 빵이 왜 그리 퍽퍽하고 목이 메던지. 문득 고개를 돌려보니, 옆에 한 젊은 여성분이 나와 똑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땀에 젖은 채 멍한 눈으로 빵을 먹는 그녀의 얼굴에서, 내 얼굴이 보였다.

수천 명이 모인 축제 같은 대회장이었지만,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그곳이 사무치게 외로웠다. "수고하셨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작은 인사 한마디를 남기고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왔다.


"이것만 뛰고 마라톤 접자"


그날 밤 11시, TV에서 마라톤 중계 녹화방송을 해주고 있었다. 마스터즈 부문 1위를 달리는 아저씨의 표정이 화면 가득 잡혔다. 그는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마치 죽으러 가는 사람처럼 달리고 있었다. 나도 오늘 저런 표정이었겠지?

그때 해설위원의 멘트가 흘러나왔다.


"아, 마스터즈 분들이 너무 힘들게 달리시는 것 같아요. 마라톤은 건강을 위해서, 즐겁게 달려야 하는데요."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그래, 즐겁지 않은 달리기가 무슨 소용이야. 이제 그만하자.' 나는 마라톤을 접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인터넷을 켰다. '하프 마라톤 참가 신청' 버튼을 눌렀다.

정말이다. 진짜 그만두려고 했다. "딱, 이것만 뛰고 마라톤 접자." 그게 나의 마지막(이라고 믿었던) 다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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