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이라고 선언한 하프 마라톤에서 '봉크'를 만나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이것만 뛰고 진짜 마라톤 접는다!"라고 선언했던 나의 은퇴(?) 무대, '스포츠 서울 하프 마라톤'. 때는 바야흐로 2017년 11월이었다.
그 사이 주말이 무료해서 습관처럼 몇 번의 10K 대회를 나가긴 했다. 대회장에서 축하 공연을 온 '하하'가 던진 아디다스 모자를 득템하는 소소한 행운도 있었지만, 마라톤에 대한 내 마음은 이미 식어 있었다. 더 이상 설렘도, 열정도 없는 권태기 연인 같은 상태랄까.
대회 일주일 전, 마지막 기념품이 집에 도착했다. '카프 슬리브(종아리 보호대)'라는 물건이었는데, 난생처음 보는 물건이라 신기해서 사진 한 장 찍어둔 게 기억의 전부다.
대회 당일 아침, 무덤덤한 마음으로 상암동으로 향했다. 하늘공원을 몇 바퀴 도는 코스. 나는 10K 이상을 뛰어본 적이 없었다. 은퇴 경기랍시고 훈련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래서 긴장조차 되지 않았다. 무색, 무취, 무료함... 내 감정 상태는 딱 그 정도였다.
그때 출발선 앞 무대에 MC분이 올라왔다. 풀코스를 수십 번 완주했다는 베테랑이라고 했는데, 누군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분이 마이크를 잡고 당부했다. "처음 하프 뛰시는 분들! 10km까지는 최대한 천천히 뛰세요. 반환점 돌고 나서 몸 상태 보고, 아프지 않게 돌아오는 게 목표입니다!"
'최대한 천천히... 오케이, 접수 완료.' 그 조언 하나만 믿고 출발 총성과 함께 발을 뗐다.
평소보다 훨씬 느린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페이스 조절 같은 건 몰랐다. 그저 본능적으로 천천히 뛰었다. 그러면서도 은근히 욕심이 났는지, 생존본능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늘 끼고 달리던 이어폰도 빼버리고 핸드폰도 짐 보관소에 맡겼다. 내 손목엔 오로지 투박한 전자시계 하나뿐.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렸다. 1km, 5km, 10km... 표지판이 하나둘 뒤로 사라졌다. 10km 지점을 통과할 때쯤, 머릿속에 위험한 생각이 스쳤다. '어? 할 만한데?'
자신감이 붙자 속도를 올렸다. 저 앞에 '2:00 페이스메이커' 풍선이 보였다. 남녀 두 분의 페이서가 대여섯 명의 러너들을 이끌고 있었다. 순간 오만함이 꿈틀거렸다. '내가 저분들보단 잘 뛸 것 같은데?' 나는 그들을 보란 듯이 추월해 앞으로 치고 나갔다.
15km 지점. 급수대에 초코파이가 쌓여 있었다. '와, 달리면서 초코파이를 먹는다고? 목 막혀서 죽는 거 아니야?' 신기했지만 먹을 자신이 없어 그냥 지나쳤다. 그때까진 몸 상태가 너무 좋았으니까.
하지만 방심은 금물. 17km 지점에서 몸이 비명을 질렀다. "배! 고! 프! 다!"
배에서 천둥 같은 꼬르륵 소리가 나더니, 몸의 전원이 뚝 꺼진 것처럼 힘이 쫙 빠져나갔다. 소위 말하는 **'봉크(Bonk)'**가 온 것이다. 다리가 천근만근 무거워졌고,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조차 없었다.
좀비처럼 흐느적거리며 18km 지점에 도달했을 때, 아까 내가 호기롭게 추월했던 2시간 페이스메이커 분들이 나를 따라잡았다. 남자 페이서 분은 안 보이고, 여자 페이서 분 혼자였다. 그리고 그녀 뒤를 따르던 무리는 전멸했다.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나를 보더니 외쳤다. "같이 가요! 조금만 버티면 골인이에요!"
나는 염치 불고하고 그녀의 뒤에 붙었다.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다른 분들은 다 어디 갔나요?"라고 물었다. 그녀는 웃으며 대답했다. "다 퍼졌어요. ㅋㅋㅋㅋ 그래서 저 혼자 왔어요."
그 말을 듣는데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아, 그래도 여기까지 버틴 내가 꽤 잘한 거구나.' 남들과 나를 끊임없이 비교하며 우월감을 찾으려 했던, 촌스럽고 욕심 많은 내 모습이었다. (과거를 회상하며 글을 쓰다 보니, 숨기고 싶은 내 민낯을 자꾸 마주하게 된다.)
19km 지점. 정신줄을 놓기 직전이었다. 나는 거의 울다시피 말했다. "살려주세요..." 그녀는 "조금만 참으세요! 다 왔어요!"라며 나를 끝까지 끌고 갔다. 정말 질질 끌려가다시피 해서 결승선을 통과했다.
기록은 1시간 57분 46초. 첫 하프 마라톤에서 기적의 '2시간 언더'를 달성한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여성 페이서 분의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어머니 같은 따스함으로 기억될 뿐.
모든 힘을 쏟아부은 나의 첫 하프 마라톤, 그리고 2017년의 마지막 레이스가 끝났다. 대회장을 빠져나와 멍하니 걷다 보니, 발걸음이 습관처럼 신촌으로 향하고 있었다. (요가 선생님과 운동하던 그곳...) 정신을 차리고 홍대에서 내려, 지금은 사라진 백반집에서 뜨끈한 미역국을 먹었다. 그제야 내가 살아있음이 느껴졌다.
그 후 한 달 동안은 누가 온몸을 두들겨 팬 것처럼 아팠다. 근육통과 함께 나의 두 번째 겨울이 시작되었다. 나는 다짐했다. '이번 겨울엔, 달리기 따윈 절대 쳐다보지도 않으리라.'
그렇게 마라톤과 멀어진 채 2017년이 저물었다. 그리고 2018년 봄이 오고, 봄이 끝날 무렵... 나는 술을 마시고 거하게 넘어졌다.
오도독. 발목이 부러지는 경쾌하고도 끔찍한 소리와 함께, 이 사고로 인하여 접었던 나의 러닝 인생 2막이 강제로 열릴 위기에 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