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폭력'이라는 글자를 꽁꽁 숨기고 대만 청춘영화의 냄새를 풍기던 포스터와는 달리 영화는 처음부터 '학교폭력'에 대한 것임을 명기한 뒤 피해자 소녀의 죽음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똑같이 푸른 교복을 입은 수많은 방관자들 사이에서 주인공 첸니엔은 시신에 겉옷을 덮어줌으로 애도를 표한다. 이 작지만 담대한 행동은 형사들이 그녀를 주목하게 만들었고 자연스레 가해자 무리는 그녀가 행여 입을 놀리지 않게 압력을 가한다. 서서히 죽은 소녀가 당한 폭력은 천니옌에게로 전이된다. 그러던 어느 날, 천니옌은 뒷골목에서 맞고 있던 베이를 구해주려다 폭력에 휘말린다. 비록 좋은 계기로 만난 것은 아니었지만 베이는 천니옌에게 호감을 느끼고 자신이 보호를 해주겠다고 하지만 그녀는 거절한다.
그렇다고 천니옌이 입시까지 꾹 참고 견디기로 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공권력을 믿고 가해자들을 신고한다. 다행히 경찰의 조사 끝에 그들은 정학을 당하고 모든 것은 법치국가의 순리대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진짜 위협은 그 후에 나타났다. 리더 격인 웨이 라이를 필두로 정학을 당한 패거리가 더 거칠 게 없는 모습으로 나타나 위협을 가한 것이다. 그제서야 진짜 '보호'가 필요함을 느낀 천니옌은 베이를 찾는다. 이후 베이는 그림자처럼 그녀의 곁을 맴돈다. 천니옌은 사람의 곁이 필요했던 그에게 온기를 나눠준다. 둘은 시궁창같은 삶에 서로의 볕이 되어준다. 함께 있을 때는 시덥잖은 장난도 치며 또래의 일상을 산다. 위태롭지만 평화로운 나날이 계속되었다-고 영화가 끝나기를 바랬지만 행복할수록 커져간 불안은 끝내 스크린에 실현되었다. 어느날, 베이는 잠시 천니옌의 곁을 비운다. 평소 행실 때문인지 강간 용의자로 잡힌 그는 죄가 없지만 쉽게 풀려나지 못하고 조사를 받은 것이다. 그리고 그 틈을 노려 가해자 무리는 천니옌의 머리를 자르고 옷을 벗겨 촬영하며 자신들의 분을 푼다. 집으로 돌아온 베이가 본 것은 쥐파먹은 머리를 하고 찢겨져 나간 필기노트를 붙이는 천니옌의 모습이다. 베이는 천니옌의 머리를 밀어주고 자신의 머리 또한 밀어버린다. 마치 상처를 꿰매고 비우고 덮어버리려는 듯.
천니옌은 예정대로 입시를 보러 가는데 같은 시간 웨이 라이의 시체가 발견된다. 경찰은 '그 날'의 영상을 확보하고 피해자인 천니옌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한다. 이 때 영화는 의도적으로 웨이 라이 죽음의 진실을 뒤로 숨긴다. 때문에 나는 처음엔 '베이가 스스로 분노에 못 이겨 혼자 웨이 라이를 죽인 것인가?' 생각하고 천니옌이 범인이 아니라는 가정 하에 피의자 심문 장면을 보았다. 이 때 피해자다움을 강요하고 복수가 당연한 살해 동기일 것이라 생각하는 경찰들의 모습에 정말 치가 떨렸다. 웨이 라이가 단순히 악랄한 존재였다면 그들은 정의로움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정말 도움이 필요할 때 그들은 어디에 있었단 말인가.
이후 영화의 결말 부분은 천이옌이 '자백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방점을 둔다. 이 부분을 매듭 짓는 것이 조금 늘어지는 느낌이 들긴 했다. 처음에는 형사가 왜 베이가 사형을 받았다는 거짓말까지 하며 자백을 받아내려 애쓰는지 이해하기 힘들기도 했다. 그러나 끝내 천이옌이 자백을 하고 편안에 이르는 모습을 보니 이런 결말이 되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림자같은 한 남자의 일방적인 희생으로 끝나는 이야기였다면 더 빠르고 쉽게 매듭이 지어지기는 했겠지만, 영화 속 천니옌은 끝내 어른이 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덧붙이자면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에서도 그랬듯 다소 늘어지더라도 인위적으로 급하게 결론을 내지 않고 캐릭터에게 충분히 시간을 주는 연출이 나는 마음에 든다.
한편 영화에서 진짜 빌런은 '입시' 그 자체같았다. 네모난 건물 안의 다닥다닥 붙어있는 책걸상들, 줄어드는 D-day 속 외워서 써야 하는 수필들, 대학만 가면 인생이 달라진다 말하는 어른들...
미국 하이틴 영화에서는 홈커밍 파티에 함께 갈 파트너를 고민하지만, 아시아의 하이틴 세계에는 파티라는 개념 자체가 전무하다. 쉼없이 경쟁을 압박해오는 이 시스템에서는 정신병이 걸리지 않기가 오히려 어려워보인다. 영화에서 천이옌 뿐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자연스레 피해자 위치에 놓였던 것은 결국 누구든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 같았다. 천니옌이 '그 날' 그리고 웨이 라이를 사고로 죽인 날 신고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가 결국 이 보이지 않는 위협 - 다가오는 시험 날짜 때문인데 이는 이 사회가 얼마나 병들어있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쑥쓰럽지만 정말 말그대로 영웅이 꿈이던 때가 있었다. 어른이 되면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바꾸는 사람이 될 줄 알았다. 그 꿈이 허무맹랑하더라도 너무 빨리 잊어버리고 말았다. 어느새 내 나이가 갓 부임한 선생님의 나이 정도가 되었다. 그 때 내 눈에 어른같던 선생님들이 사실은 자기 한 몸 건사하기 바쁜 처지라는 걸 깨닫는다. 어른이라는 이름으로 이 사회를 바꾸기에는 당장 쏟아지는 현실조차 소화하기 힘들다. 그렇다하더라도 현실 감각에 무뎌져 누군가를 외면하지는 말아야겠다. 어른이 된 첸니옌이 아이의 곁을 함께 걸어간 것 처럼. 한 사람을 돕는 것은 그 사람의 세계를 구하는 것이라고 하니... 내가 세상을 구하는 영웅은 되지 못하더라도 누군가의 삶을 조금이나마 나은 곳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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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에는 두 사람이 함께 걸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는데...
그 모습은 내 머릿 속에 그려넣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