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극장가는 얼어붙었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다. 개봉작이 거의 없을뿐더러 상영 시간이 많지 않아 원하는 영화를 볼 수 없었다. 결국 재개봉한 ‘펀치 드렁크 러브’를 관람하였다. 이미 집에서 본 적이 있던 영화지만 그때 즐겁게 본 기억이 있기 때문에 극장에서 보면 더 행복하게 감상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기억 속 영화는 이랬다. 엉망진창인 남자가 사랑을 만나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고 아름다운 사랑을 하게 되는 이야기.
그런데 극장에서 본 펀치 드렁크 러브는 기억 속 아름다운 감상과 꽤나 달랐다. 영화는 소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조용한 가운데 난데없이 차가 전복되어 굉음이 울리고 전화벨이 끊임없이 울린다. 그 와중에 주인공 배리의 7명이나 되는 여자 형제들은 그에게 쉬지 않고 잔소리를 퍼붓는다. 심지어 레나가 데이트 신청을 하는 와중에도 폰섹스 피싱 전화는 시끄럽게 울려댄다. 공장에서 작은 충돌 사고가 일어나기까지 한다.
그런 소음 속에도 남자와 여자는 서로에게 집중한다. 소음 투성이 삶 속에도 선명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사랑일 것이다. 영화의 제목에도 명시되어 있듯이 말이다. 그러니 이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 장르로 보아야 할 것이다. 영화의 서사 역시 남녀의 만남, 데이트, 갈등, 재회, 사랑에 성공이라는 전통적인 로맨틱 코미디 문법을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보편적인 이 장르의 영화 주인공들과 ‘펀치 드렁크 러브’ 속 인물들은 확연히 다르다. 바로 그 점에서 이 영화는 특별함을 지닌다. 동시에 그 지점에서 나는 이 영화를 로맨스로 보았을 때 과거와 달리 유쾌하지 않았다.
먼저 레나의 감정선을 따라갈 수 없었다. 배리의 여동생 직장동료인 그녀는 처음부터 여동생의 가족사진에서 그를 보고 마음에 들어했다. 즉, 영화가 시작하기 전부터 그녀는 남자를 좋아했으며 그 마음은 끝날 때까지 큰 변화 없이 지속된다. 물론 현실에서 어딘가 어색하고 어리숙한 사람을 이유 없이 사랑하게 될 수도 있다. 첫 데이트에서 마일리지를 얻기 위해 푸딩을 사재기한다는 점을 이해하고 넘어갈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여동생에게 들은 그의 치부를 이야기하자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한 뒤 손에서 피를 뚝뚝 흘리고는 지배인에게 쫓겨나는 상황 또한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는 것은 영 이상하다. 그녀의 사랑은 지나치게 조건이 없다. 레나는 마치 자아가 없는 단지 배리 이건을 성장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여신인 것 같다.
물론 레나에게도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영화는 배리의 시점에서 주로 전개되기 때문에 그녀의 시점을 설명할 틈이 없었던 것이다. 하와이에서 둘이 사랑을 나눌 때, 폭력적인 단어들로 그들만의 방식으로 애정을 표현하는 모습은 둘이 많이 닮아있음을 내비치기도 한다. 의상의 색깔 변화를 통해 그녀와 배리가 서로 융화되는 과정이 드러나기도 한다. 그러나 배리 이건에게 쏠린 영화의 무게를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레나도 호텔에서 기둥이라도 뽑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이렇게 두 캐릭터 간의 균형이 맞지 않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감정선을 따라가기 힘들었고, 때문에 유려하게 포착된 로맨틱한 장면들에서 아무런 감흥을 느낄 수 없었다.
사실 무엇보다 관람하는 내내 배리 이건을 도저히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에 그들의 로맨스를 보는 게 괴로웠다. 아담 샌들러의 연기는 훌륭했다. 지나치게 훌륭해서 문제였을까? 그는 기 센 누이들 사이에서는 자신의 의사를 확실히 표현하지 못 하지만 회사에서는 권위적으로 행동한다. 또 그의 억눌려 발산되지 못한 분노는 엉뚱한 곳에서 분출되곤 하는데, 그 분노는 다분히 과장되어 보인다. 그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으며 인격적으로 미성숙한 인간이다.
결국 이 영화는 남녀 주인공의 상호적인 로맨스라기보다는 배리 이건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통한 성장 이야기로 봐야 할 것 같다. 영화는 계속해서 레나의 사랑으로 인해 배리가 변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그가 폰섹스 사기단에게 직접 찾아가 '난 사랑하니까 강하다'라고 선언하면서 방점을 찍는다. 레나를 지키기 위해서 강수를 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사실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뒤늦게 해결한 것뿐이다.
자신의 문제를 타인의 조건 없는 사랑을 통해 구원받을 것이라 믿는 것은 일종의 판타지라고 생각한다. 또한 영화 속에서 나타나는 사랑은 이성적인 사랑이라기보다는 유아기에서 갈구하는 무조건적인 애정에 가까워 보인다. 내가 사랑에 대해 지나치게 냉소적으로 변한 걸까? 하지만 별 수 없다. 한 대 맞은 듯 정신없이 취하는 사랑은 언젠가 깨기 마련이니 말이다.